미묘한 시기에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쓴 날은 대선 이틀 전(7일), 글이 신문과 뉴스페이지에 나가는 때는 대선 다음 날(10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마도 많은 분들은 기대, 흥분, 근심, 초조 같은 감정이 가장 고조돼 있을 것이고, 이 글이 읽히는 시점이 되면 희망과 좌절, 환호와 분노 같은 대립되는 감정이 유권자들 사이에 엇갈리고 있을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갈등이 고조되는 것은 민주주의가 치러야 할 불가피한 비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조된 갈등은 가라앉혀야 하며, 그 갈등을 어떻게 수습해 가느냐가 우리 사회의 성숙과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물론 나의 믿음을 따르라는 식으로 통합을 외친다면 그것은 독선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는 갈등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을 갖춘 사회여야 한다. 이러한 갈등 해결 노력이 바로 다양성 속의 통합을 이루는 길이며, 갈등 해결 없이는 진정한 선진국이라 자부할 수 없다.
실제로 한 사회에서 축적되어 온 여러 형태의 갈등은 선거운동 기간 중 더 쉽게 발현되곤 한다. 이념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남녀 갈등 등을 그 예로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이러한 갈등 중 일부는 완화되고 있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거나 새로이 대두되는 갈등도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우리가 갈등 해결에 익숙지 못한 탓이겠지만, 우리가 그동안 사회적 갈등의 해결이라는 문제를 긴박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힘써 해결해야 할 중요하고도 가장 긴급한 과제 중 하나가 되었다.
갈등 해결 능력을 높이려면 갈등의 근원을 직시해야 한다. 그 근원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의 부족이 자리 잡고 있다. 상호 신뢰와 존중이라고 하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은 갈등 상황의 해결은 물론 경제성장에도 유리하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고도 성장기에 물적 자본을 투자하듯이 국가 주도로 사회적 자본 투자율을 높이는 식의 정책을 펴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구성원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수입도 불가능하므로 이 땅에서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 가는 수밖에 없다.
사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그런 신뢰와 존중이 결여된 품위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선거가 끝난 이제 그런 아쉬움을 바탕으로 국민의 관심을 사회의 품위와 품격을 높이는 방향으로 옮겨갔으면 한다. 앞으로 경제성장률 같은 지표에 앞서 '구성원 간 기본적 신뢰가 있는 품위 있는 사회'를 우리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아 보면 어떨까?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긴박하고 절실한 문제들을 잘 해결해 왔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긴박함과 절실함의 자각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번 대선은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해왔기에 대선 바로 다음 날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생각하기는 더욱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 과정 중에 우리가 잃어버린 품위를 되찾고 우리에게 긴박하게 요구되는 갈등 조정 능력을 쌓아가고자 한다면 국민 개개인이 그 어려움에 맞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당선자에게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쓴소리를 존중할 수 있는 진정한 지혜와 용기가 함께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