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에서는, 부디

입력
2022.03.10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희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너무 억울합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2019년 11월 13일 법정에서 무릎을 꿇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14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은 이 할머니는 2016년 곽예남 할머니 등 다른 위안부 피해자 19명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일본 측은 2015년 체결된 '한일 위안부 협정'으로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며 소장을 접수하지 않는 방법으로 재판을 지연시켰고, 결국 재판이 열리는 데에만 장장 3년이 걸렸다.

그로부터 3년 뒤 법원은 이 소송을 '각하'했다. 법원은 한 국가의 행위에 대해 다른 나라의 법원이 심판할 수 없다는 주권면제론을 적용했다. 하물며 우리 땅에서 우리 국민을 상대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일본정부의 소행이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판결이 있기 불과 3개월 전 같은 법원 다른 재판부는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해자 측 손을 들어줬다. 해당 재판부는 "반인도적 범죄엔 주권면제론을 적용할 수 없다"며 "원고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관습'보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앞선 판결만 철석같이 믿고 선고재판에 참석했던 이 할머니는 결국 재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법정을 나섰다. 이후 취재진 앞에 선 이 할머니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붙잡느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무심한 시간은 또 흘러 2022년이 됐다. 법원에서 희망을 짓밟힌 이 할머니는 이제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의 유엔 고문방지위원회(CAT) 회부를 촉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서다. CAT 회부는 국제사법재판소와 달리 일본 동의 없이도 가능하다. 하지만 94세에 엄동설한을 뚫고 3번이나 청와대로 갔음에도 모두 문전박대당했다. "바람 맞고 병들어 죽으라는 거냐. 내가 무슨 죄가 있냐"는 이 할머니에게 정부는 "검토 중"이라는 무심한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

정권 초반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문재인 정부는 정권 출범 직후 2015년 위안부 협정을 강하게 비판하며 부리나케 합의 재검토에 착수했다. 그 결과 "협정에서 절차적, 내용적으로 중대한 흠결이 발견됐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파기하거나 재협상하겠다는 뜻은 밝히지 않았다. 도리어 지난해 이를 국가 간 공식합의로 인정해버렸다. 문 대통령이 정권 초반 강조했던 '피해자 중심 해결'은 이렇게 또 한 번 공허해졌다.

피해사실이 발생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단 한 가지, 생존자 수뿐이다. 지난달에도 할머니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생존자는 이제 12명뿐이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할머니들에겐 시간이 없다. 더 많은 이들이 스러지기 전에 수십 년간 응어리진 그들의 원통함을 이제는 풀어줘야 한다.

할머니들이 떠나도 피해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들이 남긴 증언 속에서 언제고 되새김질될 테다. 역사의 꼬인 실타래를 풀지 못하는 정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이번엔 반드시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

김진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