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나선 러시아를 봉쇄하기 위해 조준한 주요 표적 중 하나가 러시아의 신흥 재벌, 일명 '올리가르히'다. 옛 소비에트 연방의 자산을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등 중요 사업 분야를 차지하면서 급성장한 러시아 재벌은 현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평가 속에 서방의 집중적인 제재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백악관은 3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푸틴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올리가르히와 그 일가족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다. 철강·광산업체 메탈로인베스트의 알리셰르 우스마노프, 송유관 업체 트란스네프트의 니콜라이 토카레프, 항공·전기 등 전략산업분야 국영기업 로스텍의 수장 세르게이 체메조프 등이 이름을 올렸다.
프랑스 재무부도 이날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의 이고르 세친이 보유하고 있는 호화요트를 압류했다고 밝혔다. 유럽연합(EU)은 이에 앞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지난달 24일 올리가르히를 대상으로 한 대대적 제재 조치를 발표한 바 있다.
올리가르히 중에 서방과 가장 친근한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이 소유한 영국 프리미어리그 구단 첼시 FC를 매각하고 그 일부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해 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국 가디언은 "이 자금 중 일부는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 군인과 가족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나딘 도리스 영국 문화부장관은 이날 의회에 출석해 "영국 축구가 러시아 도적 집단의 투자를 너무 오랫동안 참아 왔다"고 답변하며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올리가르히는 본래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값싸게 민영화한 소련 국영기업을 운영하며 급성장한 이들이다. 이후 러시아의 경제 위기로 민심이 흔들리자 옐친 정권을 지지하던 기업인들은 '유능한' 푸틴을 그의 후계자로 밀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집권 후 정권에 충실한 이들은 지위를 유지해 주고, 그렇지 못한 인사들은 반부패 수사 등으로 제거했다.
언론인 출신 러시아 전문가인 벤 주다 애틀랜틱카운슬 선임연구원은 "푸틴은 크렘린과 가까운 기업가들의 돈을 사실상 본인의 돈으로 생각한다"면서 "그동안 올리가르히의 자본은 해외에서 푸틴의 이해를 지원하기 위해 사용돼 왔다"고 설명했다.
세계 금융의 중심지 중 하나인 영국 런던은 특히 러시아 자본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슬라브어로 '도시'를 뜻하는 '그라드'를 붙여 '런던그라드'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다.
국제투명성기구는 러시아 정부와 가까운 부유층이 런던에 약 20억 달러(약 2조4,20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미 제재 대상이 된 우스마노프도 대리인을 내세워 프리미어리그 에버턴 FC를 실소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에버턴은 이날 우스마노프가 운영하는 기업과의 스폰서십을 중단했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는 이들을 향한 광범위한 제재 조치가 '올리가르히 시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편으로는 제재 회피를 위해 러시아 부유층이 내놓는 '급매물'을 매입하겠다는 문의도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 브라이언트 영국 노동당 의원은 "아브라모비치도 런던에 있는 자신의 맨션과 펜트하우스를 급히 처분하려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