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7월, 독일 서베를린 템펠호프(Tempelhof) 공항. 미 공군 수송대 파일럿 게일 할보르센(Gail S. Halvorsen, 당시 27세) 중위가 철조망 너머 20여 명의 아이들과 마주쳤다. 군 기지여서 그랬던지 다소 겁먹고 주눅 든 표정의 아이들에게, 할보르센은 호주머니에서 껌 두 개를 꺼내 네 조각으로 나눠 건넸다. 행운을 얻지 못한 아이들도 빈 껍데기를 돌려가며 냄새 맡으며 입맛을 다셨다고 한다. 오히려 미안해진 그는 불쑥 '내일 다시 오면 비행기로 과자를 잔뜩 뿌려주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아이들은 '아저씨 비행기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느냐'고 반문했고, 할보르센은 '과자를 뿌리기 전에 비행기 날개를 흔들겠다(wiggle the wings)'고 말했다. 주둔군의 현지인 사적 접촉이 금지된 때였고, 허가 없이 비행기 바깥으로 물건을 투하하는 것도 당연히 군법 위반이었다.
그의 약속을 공군 당국이 승인해줄지 미지수이고, 심사 절차에 몇 주가 걸릴지도 알 수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Rhein-Main) 공항 기지로 복귀한 할보르센은 껌과 사탕, 초콜릿 바 등을 잔뜩 모은 뒤 손수건으로 만든 낙하산에 매달아 다음날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날개 흔드는 아저씨(Uncle Wiggly Wings)'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점차 늘어났다.
그의 비밀 사탕 투하 작전을 알게 된 미 공군당국은 뒤늦게 '리틀 비틀스 작전(Operation Little Vittles)'이란 명칭의 공식 작전으로 승인, 이듬해 9월까지 14개월간 소련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던 서베를린의 아이들에게 23톤의 과자를 비행기로 뿌렸다. 폭탄이 아닌 사탕을 퍼붓는 미군 수송기는 서베를린 시민들, 특히 아이들에겐 희망과 믿음의 작은 상징이 됐다. 패전국 시민인 자신들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희망. 고통으로 응징 당해야 할 나치 지지자가 아니라 인류의 일원으로 바라봐주는 이들이 있다는 믿음.
동서냉전의 서막이라 불리는 봉쇄 상태의 서베를린 상공을 '사탕 폭격기(Candy Bomber)'로 누비며, 미국 정부의 '마셜플랜'이 추구한 바를 앞서 성취한 게일 할보르센이 2월 16일 별세했다. 향년 101세.
2차대전 승전국 미국과 영국 소련 수뇌부는 45년 2월 얄타에서 독일 분할 통치-자유총선거에 합의했고, 8월 포츠담에서 수도 베를린 분할을 결의했다. 동시에 소련은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등 동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미국과 유럽은 서유럽 부흥계획인 마셜플랜(47년)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49년)로 소련을 견제했다. 그렇게 냉전이 시작됐고,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소련이 네 개 지구로 분할했다가 영-프 지구가 미국 지구와 통합하면서 동서로 나뉜 베를린은 최전선이 됐다.
'라인강의 기적'이란 훗날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닐 만큼, 전후 독일은 거의 폐허였다. 주요 도시 공장과 토지, 주택들은 약 80%가 파괴됐고, 독일제국화폐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다. 경제는 배급과 물물교환, 암시장으로 굴러갔다. 화폐개혁은 경제 회생의 첫 단추였다. 미국은 마셜플랜의 첫 단추로 48년 6월 20일, 새 화폐인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했다. 소련은 미국 주도 단일 화폐 시스템 안에 동독을 편입시킬 의향이 없었다. 오히려 동독 지구 내 섬처럼 박힌 서베를린을 삼키고자 했다. 사흘 뒤인 23일, 소련은 연합국이 합의한 항공노선을 제외한, 서베를린의 모든 육로와 라인강 수로를 차단하는 '베를린 봉쇄'를 감행했고, 서베를린 시민 200만 명은 하루아침에 식량도 의약품도 난방용 석탄도 배급받지 못하는 고사 위기에 몰렸다. 당시 서베를린은 전력도 75%를 도시 바깥, 즉 동독 지역서 조달하던 처지였다. 당연히 전기도 끊겼다.
프랑크푸르트와 비스바덴 공항에서 서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하루 평균 5,000톤의 식량과 석탄, 건설장비 등을 실어 나르는 미국 주도 사상 최대-최장기간 공수 작전인 '비틀스 작전(Operation Vittles)'이 6월 28일 시작됐다. 미군 수송기 파일럿들은 소련 당국의 비행 교란 전파와 악천후에도 약 15개월간 하루 평균 3차례 저 노선을 왕복(총 18만9,963회)하며, 90초당 한 대꼴로 템펠호프 공항을 이착륙했다. 그 과정에서 미 공군만 28명이 과로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서베를린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Ernst Reuter)가 폭격으로 허물어진 제국의회 의사당 폐허 앞에 서서 서방 세계를 향해 "이 도시와 시민들을 지켜달라고,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한 게 48년 9월 9일이었다. 그렇게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버틸 수 있을지 누구도 기약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할보르센이 그들 수송기 파일럿 중 한 명이었다.
게일 할보르센은 1920년 10월 10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아이다호 릭비(Rigby)를 거쳐 유타주 갈런드(Garland)에서 영세한 사탕무 농장을 일구던 농부였고, 할보르센도 형제들과 함께 "매일 밭고랑에 고개를 처박고 살다시피 하며 성장"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시작된 미국 중서부 농부들의 가난과 굶주림이 그의 청소년기 일상이었다. 훗날 그는 황막한 서부 들판 위를 가로지르며 나는 비행기를 보며 파일럿의 꿈을 꾸곤 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비행은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땅으로부터 탈출하는 비상이었다.
그가 41년 자가용 항공기 운항면장(PPL)을 획득하자마자 그해 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고, 그는 이듬해 초 육군 항공대에 입대했다. 수송편대에 배속된 그는 주로 국내에서, 더러 영국과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 대서양 전선으로 전투기와 군수품을 실어 나르며 종전을 맞이했다. 앨라배마 모빌(Mobile) 공군기지에서 근무하던 48년 6월, 그는 베를린 공수작전 파일럿으로 차출됐다. 그가 템펠호프 공항의 아이들을 만난 건 그로부터 불과 보름여 뒤였다.
그가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이입한 데는 유년의 경험뿐 아니라 주로 본토 기지에서 수송기를 몰아 사활의 공중전도, 방공 포화도 경험하지 않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대공포 위협 속에 폭탄을 퍼붓고 교전 중 전우를 잃던 상공에서, '산타 놀이'를 벌이는 그를 흘겨보는 이들도 있었다. 거의 전 유럽이, 전승국 영국과 프랑스 시민들까지 배급 식량으로 간신히 허기를 면하던 때였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기쁨)' 즉, 전후 독일인이 겪는 비참을 응보의 대가라며 고소해하던 정서도 팽배했다. 무엇보다 수송기 파일럿들은 전시 못지않게 고되고 험한 생필품 수송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환호성과 철부지들의 행복해하는 표정에는 저 증오와 복수심마저 눅이는 힘이 있었다. 한 9세 소년(Peter Zimmerman)은 직접 만든 낙하산과 함께 손으로 그린 자기 집 지도를 첨부해 사탕을 떨어뜨려 달라고 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할보르센은 다음 비행 때 그러겠다고 답장을 썼지만 아이의 집을 찾지 못했고, 얼마 뒤 아이는 다시 보낸 편지에 "파일럿이라면서.... 지도까지 줬는데..., 그러면서 전쟁에선 어떻게 이겼대요?"라 썼다고 한다. 할보르센은 그 아이에게 소포로 초콜릿을 보냈고, 작가 안드레이 처니(Andrei Cherny)는 'The Candy Bombers(2008)'란 책에 그 사연을 소개했다.
그의 '작전'에 동참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고, 약 3주 뒤 현지 언론과 AP뉴스에 '롤리팝 폭격기(Lollipop Bomber)'란 제목으로 보도까지 됐다. 공수작전사령관이던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당시 소장)는 그를 호출해 독자 행동을 꾸짖는 한편 공식 작전으로 승인했다. '리틀 비틀스 작전'이라 명명된 작전이 사령관 지시로 하달되면서, 전 수송부대원이 사탕과 초콜릿 등과 함께 과자 낙하산을 만들기 위한 손수건 수거작업에 나섰다. 미국 본토에도 그 사연이 전해져 할보르센은 48년 9월 CBS-TV와 인터뷰했고, 미국제과협회는 다량의 과자를 기부했다. 유럽 물자 수송기지였던 매사추세츠 주 치커피(Chicopee) 공군기지 인근 초등학생들은 베를린으로 보낼 사탕 낙하산 제조 자원봉사에 나섰다.
국제 여론에 궁지에 몰린 소련은 49년 5월 베를린 봉쇄를 해제했고, 미국은 스탈린의 마음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몰라 9월까지 공수작전을 지속했다. '비틀스 작전'으로 미-영 공군은 총 230만톤의 물자를 수송했고, 연합군 작전 중 가장 낭만적이고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기억되는 '리틀 비틀스 작전'도 그렇게 끝이 났다.
사탕 낙하산을 쫓아다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 애리조나에 정착한 우르줄라 융거(Ursula Yunger)란 여성은 2004년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게일 할보르센이 당시 나를 비롯한 베를린의 아이들에게 준 건 사탕이 아니라 근원적 위안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9월 애리조나 투손서 열린 베를린 공수작전 베테랑 행사에서 할머니가 된 융거를 처음 만난 할보르센은 그를 가만히 포옹한 뒤 초콜릿 바를 선물했다.
할보르센은 베를린 공수작전에 126회 참가한 뒤 49년 귀국해 플로리다대에서 항공공학 석사(51년)와 박사(52년)학위를 받았고, 캘리포니아 공군사령부에서 수송기 개량 및 우주개발 프로젝트 요원으로 일한 뒤 70년 템펠호프 공군기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성인이 된 전후의 아이들은 되돌아온 그에게 축하와 감사 편지와 선물을 보내오곤 했다. 48년 11월 할보르센에게 편지를 보내 "흰 닭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자기 집인데, 과자 폭탄때문에 닭들이 놀라도 괜찮으니 사탕을 떨어뜨려 달라"고 청한 적이 있던 한 여성(Mercedes Wild)은 그를 식사에 초대했다. 역시 집을 못 찾아 과자 소포를 보냈던 할보르센에게 그 여성은 24년 만인 72년 "닭들이 어디 있었는지 가르쳐 주겠다"며 그의 손을 이끌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일 민간인을 살상한 연합군의 전시 전략폭격을 제쳐 두더라도 전후 미국을 비롯한 전승국의 대독일 정책은 사실 가혹했다. 미국 성인 기준 하루 평균 음식 섭취량이 3,200 Kcal(미군은 4,000 Kcal)였고, 영국인 배급 식량도 평균 2,900 Kcal였던 당시 독일 시민 배급량은 700~1,200 Kcal에 불과했다. 700만~1,000만명에 달하던 유럽 전쟁난민 수용소 배급 식량(1,600~2000 Kcal)보다 적었다. 기아 속에 장티푸스와 이질 등 전염병까지 겹쳐 45~49년 독일인 수십만 명이 숨졌다. 점령지 시민의 '비나치화'에 총력을 쏟던 미국은 나치 잔당의 준동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주둔군 장교 가정에서 남은 음식물조차 독일인 가사노동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금했다. 당시 미국 정보당국 문건에는 한 독일인 병원 의사가 "병원 환자들에게 대단히 요긴할 수 있는 20리터나 되는 코코아를 미군 병사들이 하수구에 쏟아버리는 것은 불필요한 악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 행위는 나로 하여금 독일 시민들에게 미국 민주주의를 편들어 주기 힘들게 한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스웨덴 작가 겸 저널리스트 스티그 다게르만(Stig Dagerman)은 1946년 10~12월 함부르크와 베를린 등 전후 독일 주요 도시를 돌며 보고 겪은 실상을 자국 잡지에 연재했다. 그 글을 묶어 펴낸 책이 '독일의 가을'(이유진 옮김, 미행)이다. 허벅지까지 물에 잠긴 지하실 간이 침대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던 루르 지역 가족들의 비참, 연합국 주둔군과 서방 저널리스트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독일 시민들에 대한 (나치 동조자라는) 의심과 적의, 감자 한 알에 목숨을 거는 거리의 아이들과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몸을 파는 여성들.... '차라리 히틀러 시절이 나았다'고 말하는 독일 시민들을 두고 윤리적-이데올로기적 타락을 진단하던 전후 서방 언론의 모든 분석에 다게르만은 물음표를 던졌다. 그는 "사람들은 바로 이 독일의 가을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불행에서 교훈을 배우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은 굶주림이 몹시 형편없는 교육자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썼다.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의 이름은 자유 선거가 아니라 식량 공급이 개선되는 상황, 희망이 있는 삶"이라고도 썼다. 하지만 다게르만도 당시 독일 시민들이 '굶주림의 겨울(Hunger Winter)'이라 부른 46~47년의 겨울은 경험하지 못했다. 생디칼리스트인 다게르만 같은 이들에게 할보르센 등의 '과자 폭탄'은, 시작은 순수했을지 몰라도, 냉전 선전전의 작은 삽화쯤으로 폄하될지 모른다.
할보르센은 비행시간 8,000여 시간을 채우고 74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사령관 시절 상담-지도 과정 석사를 이수한 그는 은퇴 후 유타 주 브리검영 대학 학생담당 부학장으로 일했다. 3남2녀를 낳고 50년을 함께 한 아내(Alta, 1999년 작고)와 후기성도교회(몰몬교) 선교사로서 영국과 러시아 등지를 다녔고, 1999년 아내와 사별하고 4년 뒤 재혼(Lorrain)했다. 그는 전후 미국 의회와 서독 등 유럽 여러나라로부터 훈장과 다수의 상을 받았고, 여러 행사에 초대받아 강연과 인터뷰로 '리틀 비틀스 작전' 취지와 에피소드를 전했고, 자원자들과 팀을 꾸려 전후 일본과 알바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라크 등 전쟁지역에 사탕을 뿌리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2020년 10월, 그의 100세 생일에 가족과 친지들은 헬리콥터로 초콜릿 바와 사탕을 뿌리며 그의 사랑을 환기했다. 그는 2002년 비영리 국제 종교, 교육, 자선단체인 '할보르센 가족재단'을 설립했고, 2016년 '게일 할보르센 항공교육재단'과 학교를 세워 '사탕 폭격수'들의 휴머니즘을 계승하는 청년 파일럿과 과학-공학자들을 양성했다. 그는 "상대방이 공포와 절망으로 압박하는 상황에서도 감사와 희망과 나를 뛰어넘는 헌신은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베를린 공수작전을 통해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항공학교 캐치프레이저도 '나를 뛰어넘는 헌신(Service before self)'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