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엎인 양파밭, 타들어가는 농심

입력
2022.03.05 11:00
16면




옅은 구름 아래로 펼쳐진 시골 풍경이 마치 캔버스에 그린 수채화 같습니다. 붉은 황토밭이 헌 옷 깁듯 조각조각 이어진 정겨운 들판엔 농민들의 남다른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전남 무안군 해제면 들녘.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싱그럽게 자라던 양파가 단 한 뿌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민들이 수확을 한 달여 앞두고 양파밭을 통째로 갈아엎었기 때문입니다. 푸릇푸릇한 양파 이파리 대신 붉은 황토가 뒤덮은 양파밭은 이 동네에서만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1일 무안군 청계면 구로리에서 정상철 농민회장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양파밭에 물을 주고 있던 정 회장은 긴 한숨부터 내쉬었습니다. 그는 일대 양파밭이 갈아엎어진 이유를 "코로나19로 양파 소비가 줄면서 저장 양파 가격이 크게 떨어졌는데, 조생 양파까지 출하하면 가격이 더 떨어질 게 뻔하고, 인건비도 건지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금껏 양파값 파동 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가격이 오르면 중국에서 수입해서 가격을 잡고, 양파값이 내리면 비현실적인 가격으로 산지 폐기해 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우리도 언제 폐기할 지 모르지만 그래도 농부가 키우는 작물에 물은 줘야 되지 않겠나." 그는 말 없이 양파밭을 응시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저장 양파 재고물량은 평년 대비 8% 늘어난 8만8,000t에 달합니다. 시장에 내놓지도 못한 저장 양파가 이미 넘치는 데다, 코로나19 여파로 소비 부진까지 겹치자 저장 양파 가격은 지난해에 비해 80%나 폭락하고 말았습니다. 전국 최대 규모의 농산물 도매시장인 서울 가락시장 기준 가격은 1월 ㎏당 500원대에서 최근 300원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전국양파생산자협회는 정부의 수급조절 실패가 가격 폭락의 원인이라며 현실적인 지원 대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협회는 지난달 23일 전남 고흥을 시작으로 24일 제주, 지난 4일엔 전남 무안에서 출하를 앞둔 조생종(햇) 양파밭을 대대적으로 갈아엎었습니다. 정 회장의 마을에서도 양파를 생산하는 농민들 일부가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양파밭을 갈아엎어야 했죠.


특히, 전국 양파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며 국내 최대 생산지로 알려진 무안군 농민들의 심정은 요즘 매일매일 타들어갑니다. 김영진 무안 해제 양파생산자연합회 사무국장은 "채소 가격 안정제는 물론이고, 정부의 산지폐기 보상 비용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면서 "2022년 조생 양파 경영비가 평(3.3㎡)당 1만4,700원인데, 산지폐기 지원금은 고작 7,440원에 불과하다. 최저 생산비인 1만2,000원 선으로 올리지 않으면 일어설 방법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양파 속이 알차게 여물어 가는 춘삼월, 양파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속은 갈아엎어진 밭처럼 무참히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서재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