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보이지 않는 빛'이 중요하다

입력
2022.03.03 15:00
15면
소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2

편집자주

어렵고 낯선 과학책을 수다 떨 듯 쉽고 재미있게 풀어냅니다. ‘읽어본다, SF’를 썼던 지식큐레이터(YG와 JYP의 책걸상 팟캐스트 진행자) 강양구씨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나온 지 7년도 더 된 책이 갑자기 떠오른 건 꿈 때문이었다. 잠에서 깼는데 너무나 선명하게 소녀와 소년의 얼굴이 표지를 가득 차지한 책이 떠올랐다. 바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민음사 발행)이다. 이 책을 사랑하는 소수의 독자 사이에서 '우.볼.빛'으로 불리는 이 소설의 원제(All the Light We Cannot See)를 처음 접했을 때는 '과학책인가?' 했었다.

비 온 뒤의 무지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빛은 빨주노초파남보의 스펙트럼으로 나뉜다. 그런데 그 스펙트럼도 사실은 가시광선 영역이라 불리는 빛의 부분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정말로 빛의 상당 부분을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빛'이라는 표현 자체가 직관에 어긋나지만 말이다.

이 매력적인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점자책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프랑스의 한 소녀(마리로르)와 나치의 소년병으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독일의 한 소년(베르너)이 주인공이다. 이 소녀와 소년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보여준 우정과 연대의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듣고서 대다수 독자는 이 소설이 과학 기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할 테다. 사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빛이 일군 중요한 매체 '라디오'다. 탄광 외에는 희망이 없는 시골 마을의 베르너 남매에게 라디오는 그들과 새로운 세상을 연결하는 희망이다. 베르너는 자신이 수리한 라디오로 나치의 선전 선동으로 만들어진 세계 밖의 진실에 눈을 뜬다.

베르너에게 가닿은 라디오 방송의 송신지는 프랑스의 해변 마을 생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형을 잃고서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은둔해 온 에티엔이 세상과 접속하는 유일한 수단은 해적 방송이다. 그는 나치가 마을을 점령하자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방송을 파리에서 피난 온 조카 손녀 마리로르의 도움을 받아서 계속한다.

이처럼 이 소설에서 라디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행위자다. 이런 라디오와 베르너의 상호작용은 결국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낳는 계기가 된다. "네 인생은 늘 기다림뿐이었어. 그런데 지금 기회가 온 거야. 그래, 준비됐니?" 놀랍게도, 이 소설의 진짜 화자는 라디오였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중요한 행위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또 근대 이후 상식처럼 얘기되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이분법적인 통념(선/오용론, 합리주의/신비주의 등)이 과학기술 시대 우리 삶을 제대로 담기에는 한계가 또렷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한다. 이 소설을 좋은 '과학책'으로 권하는 이유다.

물론 소설 자체의 재미와 감동만 놓고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2015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이 소설은 미국에서 2년 가까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에 머물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갈수록 빛을 잃는 요즘, 특히 세상 한쪽에서 비극적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더욱더 눈길이 가는 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진행하는 독서 팟캐스트의 추천으로 이 소설을 뒤늦게 접한 한 독자는 이런 감상을 남겼다. "이 책을 지금 막 다 읽고 먹먹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이토록 맑고, 과하지 않고 절제하며,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라뇨! 책 읽은 사람과 한참 도란거리고 싶은 마음입니다."(jsha*)

물론 이 책을 다 읽고서 과학책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멋진 선택지가 있다. 고재현의 '빛의 핵심'(사이언스북스 발행)은 우리말로 쓰인 빛에 대한 최고의 과학책이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라디오는 어떨까. 라디오가 한반도에서 우리와 함께 어떻게 삶을 빚어 왔는지를 보려면 김동광의 '라디오 키즈의 탄생'(궁리 발행)을 읽어보자.

과학책 초심자 권유 지수: ★★★★★ (별 다섯 개 만점)


강양구 지식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