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현지시간) 새벽, 우크라이나를 향한 급작스러운 러시아의 공격이 이뤄지면서 수도 키예프에는 공습경보가 울렸다. 일부 시민들은 곧바로 짐을 싸 서쪽으로 내달렸다. 전쟁을 피해 폴란드, 루마니아 등의 국경을 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은 ‘조국을 떠날 수 없고 떠나서도 안 되는’ 사람들의 피난처였다. 러시아의 공격이 가까워지면서 시민들은 더욱 지하철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섯 밤이 지나갔다. 지상에선 공격이 이어지는 사이, 지하에 있는 이들은 우는 아이들을 달래고, 함께 국가(國歌)를 부르며 승리를 기원하고, 손을 모아 기도하며 평화를 바라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AP통신이 소개한 우크라이나 대피소의 모습이다.
키예프 페체르스카야 지하철역은 시민들이 대피하며 끌고 온 유모차와 반려동물이 담긴 가방으로 가득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역 안으로 몰리며 공간이 좁아지자 키예프 당국은 수용 공간을 늘리기 위해 전철까지 개방했다. 이곳에서 만난 데니스 셰스타코프(32)는 무서워하는 5살짜리 딸을 위해 밤새 동화를 들려주며 안심시켰다. 그는 AP통신에 "악몽을 꾸는 데에 익숙해졌다"며 "지금 이 상황도 악몽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격전이 벌어지는 제2도시 하르키프와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의 대피소 상황도 비슷하다. 마리우폴은 러시아와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로 지난 2014년 크림반도 강제 합병 때에도 친러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지역 주민 대부분이 당시 사태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AP통신은 설명했다. 2014년 반군의 공격으로부터 겨우 살아남았던 안나 델리나씨도 그중 하나다. 대피소로 이용되는 동네 체육관에서 델리나씨는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다"라며 8년 새 생긴 두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러시아군의 폭격이 쏟아지고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하르키프시에선 수만명이 곳곳의 지하철역에 대피해있다. 역내 화장실에선 오물이 넘친다. 차가운 역 바닥에 담요와 외투를 깔고 자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다. 하지만 불평은 없다. 손자가 참전했다는 이리나(74)씨는 "최전선에 있는 군인들은 훨씬 힘들 것"이라며 "차가운 바닥이나 더러운 화장실로 불평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식량이다. 교전 탓에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염려해 안에 장기간 역에 머물면서 먹을 것이 동이 났다.
대피소 곳곳에서는 조국의 승리를 기원하고 사기를 북돋기 위해 국가를 부르는 모습이 때때로 목격됐다. 이날 키예프 오볼론 역에서 한 시민이 트럼펫으로 국가를 연주하자 주변 시민들이 가만히 선 채로 선율을 감상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왔다. 또 다른 영상에선 대피소로 이용되고 있는 키예프 시내의 한 보육원에서 어린아이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국가를 불렀다.
방공호나 대피소에 모여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 대부분은 어린이와 아이가 있는 여성,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18~60세 남성들은 무기를 들고 러시아군과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키예프 오볼론역에 어머니와 대피 중인 크리스티나 베르딘스키는 미국 npr에 “이곳에서 사람들이 뉴스를 공유한다”며 “러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무기를 드는 평범한 우크라이나인, 러시아 탱크를 막으려 도로에 서 있는 사람들, 적과 싸우는 우리 군대를 위해 매일 기도하고 우리가 이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