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3주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달 24일 제주 성산읍에서 만난 독립유공자 강태선(99) 애국지사는 인터뷰 내내 꼿꼿이 세운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강 지사는 국내외에 생존해 있는 14명의 독립유공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매년 3·1절과 광복절이 돌아오지만, 독립운동을 한 무명의 지사들이 여전히 많다"며 독립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이 그냥 묻히지 않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했다.
강 지사는 "수십 년 세월이 지나 이제는 기억도 희미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만, 일제강점기 엄혹했던 시절을 설명하는 눈빛엔 핏발이 서 있었다.
"조센징, 키타나이." '조선인은 더럽다'는 뜻의 이 말은 1939년 15세 나이로 일본 오사카로 유학간 그가 그곳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주먹다짐을 했고, 학교에선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새벽과 저녁엔 신문 배달도 해야 하는 고학생이었지만, 자신을 믿고 기대를 걸어준 이들을 차마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한다.
하지만 배움이 깊어질수록 일제 식민지배를 향한 분노도 깊어졌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된 '식민지 정책론'을 읽고서는 끓어오르는 피를 주체할 수 없었다. 한국 영화 '집 없는 천사'(1941)가 일본 극장가에서 흥행했을 땐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아졌다. "당시 아사히신문이 '조선만도 못한 일본 영화'라는 제목의 비판 기사를 낸 것을 보면서 감격스럽고 뿌듯하기도 했죠."
강 지사는 1942년 일본에 있던 친지 지원호·심종보와 함께 동지 규합에 나섰다. 재일 조선인이 일제히 봉기하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1944년 6월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이듬해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이후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한 강 지사는 당시 한국인이면 응당 했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했던 일을 내세운 적이 없다. 하지만 독립유공자에 대한 본격적 조명이 시작되면서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차례로 서훈받았다.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강 지사의 복역 기록을 갖고 있던 오사카형무소를 비롯해 일본 정부는 자료 공개 요청을 철저히 외면했다. 오사카지방법원과 일본 법무부의 허가까지 받아내고서야 기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강 지사는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수형 기록을 받아올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고 말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나름의 영예도 누리며 100세를 눈앞에 둔 강 지사에겐 일제강점기에 당했던 고초보다 이름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희생이 더 눈에 밟힌다. 당장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지원호·심종보 지사는 해방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탓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강 지사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죄다 가라앉고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이 잘됐으니 억울한 마음이 왜 없겠냐"며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나. 두 번 다시 국난을 겪지 않도록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라고 강조했다.
한일 관계가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강 지사는 "일제강점기에 극단적으로 조선인을 차별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본인도 있었다"며 "한일 어느 나라에나 있는 극우주의자만 바라보지 말고, 식민지배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일본의 진심어린 반성을 바탕으로 '협력'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관계를 우리나라 스스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