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존슨·마라도나·암스트롱...'약물 유혹'에 넘어간 별들

입력
2022.02.26 13:00
서울올림픽 육상 100m 세계신 金 벤 존슨
약물 복용 메달 박탈... 징계 후 또 약물 '영구제명'
2013년 약물 근절 홍보대사로 한국 찾기도
마라도나, 94월드컵 도중 도핑 발각 추방당해
'사이클 황제' 암스트롱, 동료가 '도핑 목격' 폭로
전무후무 '투르 드 프랑스' 7연패 취소

20일 막을 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선수 중 금지 약물 양성 반응을 보인 선수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피겨스케이팅 페어 종목에 출전해 11위에 오른 스페인의 라우라 바르케로(21) 선수 도핑 샘플에서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유사한 효과를 내 근육의 발달을 돕는 금지 약물 '클로스테볼(Clostebol)'이 검출됐다고 국제검사기구(ITA)가 23일 밝힌 건데요.

이란의 남자 알파인 스키선수 호세인 사베흐 셈샤키(37), 우크라이나 여자 스키 선수 발렌티나 카민스카(35), 우크라이나 봅슬레이 여자 선수 리디야 훈코(29)가 금지약물 검출로 징계 대상이 된 데 이어 이번이 네 번째입니다.

앞서 베이징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종목에서 압도적 실력을 겸비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던 러시아의 카밀라 발리예바(16)는 대회 전에 제출한 샘플에서 금지 약물이 나왔는데도 경기에 출전하면서 대회 내내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4년 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올림픽을 준비한 다른 많은 선수들이 '불공정'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사태가 커진 탓이죠.

이처럼 올림픽을 비롯해 대형 국제대회 때마다 금지약물 논란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탁월한 실력으로 스포츠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거나 감동을 선사했던 스타들도 있습니다.

사실 운동 선수들은 20세기 초반부터 기록 향상을 위해 약물을 복용했을 정도로 도핑의 역사는 오래됐습니다. 아마도 고된 훈련보다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에 약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이처럼 경각심이 낮았던 선수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선수가 사망하는 사고까지 발생한 거죠. 덴마크의 사이클 선수가 개인도로 경기 도중 자전거에 떨어져 숨졌는데, 조사 결과 사망 원인이 각성제인 암페타민 과다 복용으로 밝혀져 스포츠계를 놀라게 한 겁니다.

이를 계기로 1960년대 중반부터 각 경기 연맹은 약물 복용을 금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1967년 약물 복용을 금지하고, 1968년 프랑스 그르노블 동계올림픽부터 도핑테스트를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지 약물 양성 반응이 나와 메달을 박탈당한 첫 번째 선수는 1968년 멕시코시티 하계올림픽 근대 5종에서 동메달을 딴 스웨덴의 한스 군나르 리렌바르라는 선수입니다. 그는 경기 후 도핑검사 결과 신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알코올을 복용한 것으로 확인돼 메달을 박탈당했습니다.


①'인간 탄환' 벤 존슨, 사흘 만에 '약물 탄환'으로

역대 올림픽에서 금지 약물 복용으로 메달을 박탈당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아마도 1988년 서울올림픽 육상 100m에서 세계신기록(9초79)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캐나다의 육상 선수 벤 존슨일 겁니다.

그는 1987년 로마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종전 세계기록(9초93)을 깨고 사상 최초로 9초8대(9초83)에 진입한 데 이어 1년 만에 다시 처음으로 9초7대에 들어서는 경이적 기록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특히 전 대회였던 1984년 LA 올림픽에서 1961년생 동갑내기 라이벌인 칼 루이스(미국)에 밀려 동메달에 머문 그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올림픽에서 '만년 2인자'의 설움을 한꺼번에 날려버렸죠. 당시 초반부터 치고 나오며 압도적 레이스를 펼친 그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 뒤처진 칼 루이스를 힐끗 쳐다보며 오른손을 번쩍 들고 들어올 정도로 여유를 부린 장면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딱 3일 만에 막을 내립니다. 벤 존슨이 대표적인 금지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근육형성촉진제)'를 복용한 사실을 IOC가 확인하고 공식 발표한 건데요. IOC 의무분과위원회는 발표 전 청문회를 열고 소명 기회를 줬지만, 벤 존슨은 출석하지 않고 서면으로만 "고의성이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고, IOC 발표 당일 아침 일찍 김포공항을 통해 야반도주하듯 황급히 출국했습니다.

IOC는 금메달을 박탈하고, 그에게 2년 동안 국제대회 출전을 금지했습니다. 그가 세운 세계기록도 1년 전까지 소급 적용해 모두 취소됐습니다.

징계가 풀려 복귀한 벤 존슨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준결승에서 탈락하는 등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습니다. 1993년 2월 캐나다 몬트리올 육상대회에 출전했다가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복용한 사실이 드러난 그는 결국 영구 자격정지 처분을 받고는 영영 트랙을 떠나게 됐죠.

벤 존슨은 2013년 9월 호주의 스포츠의류 회사와 함께 진행한 도핑 방지 캠페인을 위해 한국을 다시 찾기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코치가 '다른 선수들도 다 복용한다. 경쟁하려면 너도 복용해야 한다'며 권유해 고민 끝에 하겠다고 했다"며 "나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한다"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서울올림픽 당시) 칼 루이스 등 대다수 선수가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있었으나 나만 걸려 정치적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②"마약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마라도나 뒤늦은 후회

아르헨티나에 1986년 멕시코월드컵 우승, 90년 이탈리아월드컵 준우승을 안긴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도 약물 복용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94년 미국월드컵 조별예선 경기 후 약물검사에서 금지약물인 에페드린 양성반응을 보인 겁니다. 흥분제의 일종인 에페드린은 대표적 흥분제인 암페타민보다는 약하지만, 많은 양을 사용하면 정신집중력과 혈액순환을 증가시켜 경기력을 높인다고 해요.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 같은 사실을 대회 도중 발표하면서 "남은 경기의 출전자격이 박탈되는 것은 물론 국제축구계에서 영구 추방"을 천명했는데요. 그는 FIFA의 공식발표 직후 아르헨티나TV와 기자회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 결코 약물을 복용한 적이 없다는 것을 딸 앞에서 맹세한다"고 호소했지만, 강제 추방당합니다. 약물 양성 반응 전까지 조별예선 2경기에서 1골 2어시스트를 기록해 2승을 안기며 전성기 때의 실력을 과시했던 터라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충격은 매우 컸죠.

앞서 이탈리아 나폴리클럽에서 활동 중이던 91년 4월에도 코카인 양성반응을 보여 92년 6월까지 15개월 동안 국제경기 출장 금지 처분을 받았던 점도 감안됐을 걸로 보여요.

이후 선수 생명이 사실상 끝난 그는 은퇴 이후에도 마약과 술에 빠져 심장과 호흡기에 문제를 겪었다고 해요. 2004년에는 중환자실에 입원해 인공호흡기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한 그는 생전에 "축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다"면서도 "만약 내가 마약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선수 생활을 훨씬 더 오래했을 것이다. 과거이지만 아쉽다"고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③투르 드 프랑스 7연패 '인간 승리' 암스트롱도 '약물' 영구 퇴출

미국의 전설적 사이클 선수 랜드 암스트롱도 약물의 유혹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선수로 활동하던 1996년 고환암 진단을 받은 뒤 수술과 화학요법으로 극복한 그는 세계 최고 권위의 도로일주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7연패(1999~2005년)하며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평가받았죠.

이후 은퇴했다 2009년 복귀하기도 한 그의 주변에서 금지 약물 복용 소문이 흘러나왔습니다. 그의 팀 동료가 2010년 5월 "2000년 암스트롱이 경기력을 올려주는 에리트로포에틴(EP0)과 테스토스테론을 몸에 투입하는 것을 직접 봤다"고 증언하고, 2011년에는 다른 팀 동료가 미국 CBS방송의 고발 프로그램 '60분(60 minutes)'에 출연해 암스트롱의 약물 사용을 폭로했죠. 이에 프랑스 도핑방지위원회와 미국 연방검찰이 내사에 나섰지만 모두 무혐의 처리됐습니다. 암스트롱도 약물복용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반도핑기구(USADA)가 2012년 10월 국제사이클연맹(UCI)과 세계반도핑기구(WADA)에 암스트롱의 도핑 증거가 담긴 1,000장이 넘는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암스트롱은 약물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제공했다고 해요.

UCI는 도핑에 적발된 암스트롱의 '투르 드 프랑스' 우승 기록을 박탈하고 그를 영구 제명했습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딴 동메달도 박탈당했죠.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던 암스트롱은 2013년 1월 '오프라 윈프리쇼'에 출연해 결국 금지약물 사용을 시인했죠. "왜 지금까지 도핑 사실을 부인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잘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고, 나는 큰 거짓말 한 가지를 여러 번 반복했다"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는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피하는 것은 "스케줄 짜기 나름"이라고 설명도 했죠.

그의 도핑 의혹을 파헤친 영화(챔피언 프로그램)가 2015년 국내에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④'혈액도핑' 징계서 재기 페히슈타인은 50세에도 올림픽 출전

도핑에 연루된 선수들을 보면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지천명의 나이에 출전한 독일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클라우디아 페스슈타인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스피드스케이팅 장거리 선수인 그는 1992 알베르빌 대회 5,000m에서 동메달을 딴 뒤 1994 릴레함메르, 1998 나가노, 2002 솔트레이크시티에선 3연속 금메달을 걸며 이 종목 최강자로 군림합니다.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는 다른 종목인 팀 추월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죠.

그러나 2010 밴쿠버 대회는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올림픽을 1년 앞둔 2009년 초 도핑 혐의로 2년간 자격정지를 당했기 때문이에요. 수년에 걸쳐 페히슈타인의 피를 검사하고 관리했던 국제빙상연맹(ISU)이 특정한 몇몇 시점에 미성숙 적혈구(망상 적혈구) 수치가 높게 나타났다는 점을 근거로 '혈액 도핑' 판정을 내렸습니다. 혈액 도핑이란 자기 피를 뽑아 적혈구만 분리해 보관했다가 경기 전 수혈해 산소 운반 능력을 높여 지구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페히슈타인은 금지 약물 양성반응 같은 직접 증거 없이 '정황 증거'만으로 징계를 받은 첫 사례라고 해요.

그는 "유전적 이유로 적혈구 수치가 불규칙하게 나왔을 뿐 금지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스포츠중재재판소(CAS)와 스위스 연방 대법원에도 항소했지만 징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징계가 풀려 2011년 2월 장거리 선수에게 환갑이나 다름없는 39세에 복귀한 페히슈타인은 예전 기량을 되찾으며 2015년까지 세계선수권에서만 동메달 6개를 수확했습니다. 2014 소치올림픽, 2018 평창올림픽에 이어 베이징 올림픽도 출전했죠. 50세로, 출전 자체가 역사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3,000m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는데도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며 환하게 미소지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며 "마치 승리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죠. 19일 여자 매스스타트에서 9위로 유종의 미를 거뒀습니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그는 빙판 위에 엎드려 두 팔을 활짝 펴는 세리머니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결백'을 주장하는 듯합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2009년 ISU의 오판에 맞서 12년 동안 나를 방어하고 있다"고 쓰여있네요. 정황 증거만으로 인정된 도핑 혐의를 부인하는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드는데요. 진실은 본인만이 알고 있겠죠?

박민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