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습 사이렌에 도시 아수라장… 위기감 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입력
2022.02.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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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교민 임길호씨>
공습날 오전부터 피란 차량으로 도로 정체
ATM기 앞은 현금 찾으려는 줄로 인산인해
주요 물품 동나고 지하철역엔 시민들 노숙

"(러시아가 점령한) 체르노빌과 불과 100㎞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러시아군이 계속 밀어닥치고 있으니 피가 마르는 심정입니다. 도시 전체는 암흑 같은데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외곽에 머물고 있는 교민 임길호(51)씨는 25일 오전 6시 30분(현지시간)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어제(24일) 새벽 공습이 시작되자 오전 내내 우크라이나를 빠져나가려는 행렬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이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예상을 깨고 전면전을 감행하면서 키예프는 대번에 함락 위기에 처한 형국이다. 전날 우크라이나군 성명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키예프에서 북쪽으로 160㎞가량 떨어진 벨라루스 국경을 통해 남하해 키예프주 북부에 진입했다. 또 여러 경로로 우크라이나 영토로 진격하면서 키예프 인근 보리스필 국제공항과 군사 기반시설을 공격했다. 임씨는 "키예프와 가까운 지역도 폭격 피해가 발생했다는 소식도 있어 교민들이 외출을 자제한 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씨는 "20년간 우크라이나에서 살면서 이번처럼 전시 상황이 급박하게 닥친 적은 없었다"며 "어제 한국대사관에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고 연락했지만 차마 친구들과 동료들을 두고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임씨와의 일문일답.

-러시아 공격이 시작된 직후 현지 분위기는 어땠나.

"어제 오전에 시내 쪽으로 나갔더니 국경 인근 지역으로 빠져나가려는 차량들이 쭉 밀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은행 ATM기 앞에는 통장에서 현금을 빼내려는 이들로 인산인해였고, 주유소 앞에도 기름을 넣으려는 차들이 10m 넘게 줄지어 섰다. 방탄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새벽 공습 때에 이어)오후 4시쯤에도 사이렌이 울렸는데 어떤 상황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키예프에서 빠져나갈 사람은 다 나가서 지금은 오히려 도시가 조용하다."

-수도나 전기, 식량 부족 문제는 없나.

"수도나 전기는 다행히 문제가 없지만 집 주변 대형 마트들은 아예 문을 닫았다. 시내에 나가보니 작은 매장 몇 군데만 장사하고 있었다. 지난주까지도 사재기가 심하지 않았는데 우유, 빵, 물과 같은 주요 물품은 동나 있었다. 저녁 8시쯤 마지막으로 남은 쌀과 비상식량 몇 개만 사서 나왔는데 거리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도 대부분 끊기고 지하철은 무료 운행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은 지금도 안전한 곳을 찾아 대피한 사람들이 노숙하고 있다."

-남아 있는 한국 교민들 상황은 어떠한가.

"이달 초부터 위기 상황이라는 공지가 몇 차례 내려와서 지금까지 남은 교민은 급한 사정이 있는 사람뿐이다. 이곳에 있는 한국 교민은 500명 정도로 적은 편이다. 대부분 사업하는 사람이나 유학생, 대기업 파견자, 선교사이고 나처럼 순수 교민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유학생이나 선교사들은 대부분 루마니아나 국경 인근 지역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전시 상황 한가운데에 있는 심경은.

"지금 병원에 다니고 있기도 하고 개인적 사정도 있어서 아직 우크라이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최대한 안전한 곳에 대피해 있을 계획이다. 20년을 우크라이나에서 살면서 전쟁 분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고, 지난해 10월부터는 위기가 닥칠 듯한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사람들 모두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쟁이 시작될지 몰랐다. 상당히 당황스럽다. (러시아가) 전쟁을 벌인 이유도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나주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