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와 군소를 잘 잡는 만지도 최고령 임 할머니댁' '손재주가 많은 부녀회장님댁' '만지도에서 직접 기른 전복만 판매하는 전복 생산자의 집.'
선착장에 내려 광장 커피숍 앞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던 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집집마다 붙어 있는 작은 문패들이었다. 이게 요즘 젊은 아이들이 열광한다는 힙이란 건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가 머문다.
동서 길이가 1.3㎞에 불과하다는 작은 섬, 70~80대 고령의 할머니, 할아버지 20명 남짓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통영 만지도의 첫인사다.
만지도는 원래 무인도였다 한다. 배로, 혹은 걸어서 1분 이면 갈 수 있는 바로 옆 연대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나온다는데 만지도는 그렇지 않았다. 유독 경사지고 척박한 토양 때문이라고들 했다. 그렇게 텅 비어 있던 섬에 사람이 하나둘 모여든 건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한참 지나서부터다. 만지도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다. 늦을 만(晩)에 땅 지(地) 자. 즉 다른 섬보다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게 느지막했다는 뜻이다.
작은 섬이었던 만큼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한들 조용했다. 그러던 것이 2015년 한려해상국립공원의 14번째 명품마을로 지정되면서 변신을 시작했다. 마을회관 정비사업, 벽화개선사업 등이 추진됐고 전복해물라면집, 전복 생산자의 집, 펜션 등이 속속 들어섰다. 이렇게 관광객들을 적극 맞아들이면서 입소문 듣고 온 낚시꾼들 정도만 종종 찾던 외딴섬 만지도는 통영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지도 선착장이 있는 광장 커피숍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이 섬의 최고령자가 사신다는 '임 할머니집'이 있다. 수십 년 전 섬으로 시집온 육지 처녀가 어느새 90세가 넘어 만지도 터줏대감이 됐다. 볕이 좋은 날엔 선착장에 나와 계신다는 말에 잠시 설렜지만, 날이 추워선지 만나뵙지는 못했다.
임 할머니집을 돌아 섬 위쪽으로 슬며시 오르면 그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젊은 시절 수줍은 사랑을 고백했던 '직녀길'과 바람이 사방에서 세차게 불어닥치는 '바람길 전망대', 유달리 꽃송이가 작은 토종 동백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동백나무 그늘길'을 만날 수 있다.
이 길을 지나면 다시 만지도 광장이다. 여기서 아까와 반대로 가면 연대도로 향하는 해안 덱(deck) 길이 나온다. 덱 길 왼쪽에는 너무 맑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오른쪽에는 울창한 정글숲이 펼쳐져 황홀하기 그지없다. 운이 좋으면 우아한 자태의 왜가리는 물론, 귀여운 수달도 볼 수 있다.
덱 길에서 곧장 출렁다리를 건너면 연대도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섬의 움푹 파인 만이 있고 작은 몽돌해변이 있는데, 밀려왔던 파도가 쓸려나갈 때마다 울리는 몽돌 굴러가는 소리가 마음과 정신을 절로 정화시켜준다.
만지도는 연명항에서 배를 타고 15분만 들어가면 된다. 만지도로 향하는 배편은 오전 8시30분부터 거의 매시간 있다. 동절기(11~3월)에는 오후 4시, 하절기(4~10월)에는 오후 5시까지만 운행하니 이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연대도로 곧장 들어가려면 달아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된다. 운항시간이 다소 성기다. 달아 출항 기준 오전 7시50분, 11시10분, 오후 2시10분, 오후 4시10분(동절기), 오후 4시40분(하절기) 등이다. 연대도에서 나오는 배편은 동절기 오후 4시30분, 하절기 오후 5시가 마지막이다.
만지도와 연대도는 구불구불 좁은 길이 무척 많다. 섬 자체가 작다고 무작정 다니다가는 꼭 들러야 할 장소들을 놓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사진으로 길을 안내하고, 장소별 해설을 제공하는 AI 챗봇 이용을 권한다. 연명항 매표소에서 안내문을 받아 QR코드를 찍으면 로그인 같은 별도 절차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다.
한참 넋을 잃고 바라봐도 계속 보고 싶은 풍경을 가진 만지도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만지도에는 제주도와 남해안을 중심으로 매우 드물게 자라는 풍란이 많았다. 매년 6~8월만 되면 흐드러지게 핀 풍란 꽃 향기가 십리까지 퍼져 황홀함을 선사했다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옛날얘기'다. 1980년대 무분별한 남획으로 풍란이 멸종돼서다.
다행히 2012년 근처 어느 무인도에서 야생풍란이 발견됐다. 곧 이를 만지도에 옮겨 심는 등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멸종된 것을 되돌린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마 잘 자란다 싶은 녀석들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려 애지중지 키우던 섬 사람들조차 난감할 때가 많다. 지난해 초에도 갑자기 풍란 하나가 사라졌다.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인데, 이를 탐내는 사람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카페리를 타고 30분 정도 가면 교과서에서만 보던 거북등대와 함께 한산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거북등대는 생각보다 아담했지만, 특유의 기개로 시선을 단숨에 빼앗았다.
한산도는 이순신 장군의 사령부가 위치했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해군기지와 같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제승당 위치에 운주당을 세워 휘하 참모들과 작전을 세우며 협의하는 등 집무실로 활용했다. 난중일기의 대부분이 여기서 쓰였다. 운주당은 칠천량해전 때 불타 없어졌으나 100여 년 뒤 조경이 이 터에 새로 집을 짓고 제승당이라 이름 붙인 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바로 옆 수루는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던 곳으로 바다가 멀리까지 훤하게 내려다보인다. 이곳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라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가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한산도로 향하는 배편은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오전 7시15분부터 시작된다. 1~2시간 간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미리 확인해야 한다. 배를 타려면 신분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준비하지 못했다면 터미널에 있는 발급기에서 주민등록등본을 200원에 출력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지만 제승당은 1975년까지 상인들이 함부로 들어와 회를 팔고 있을 정도로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평소 이순신 장군을 우상시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를 보고 1976년부터 3년간 정화사업을 벌인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선착장부터 제승당까지 연안을 따라 길을 내고, 적송을 빼곡하게 심어 놓은 탓에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해외 휴양지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오후 늦은 시간으로 갈수록 황금빛 햇살이 바다를 주황빛으로 물들여 이국적 느낌이 한층 강해진다.
못내 안타까운 점도 있다. 박정희 정권 당시만 해도 전국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이라 기둥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제승당 본당과 수루를 제외한 건물 모두를 철근 콘트리트로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제승당을 거닐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이순신 장군을 그토록 존경한다면서 정작 그의 업적을 기리는 곳을 콘크리트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건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