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시작됐어요. 폭격이 두렵습니다. 이곳을 떠나야 해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사는 주민 옥사나는 24일(현지시간) 새벽 세 살배기 딸을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고 황급히 집을 떠났다. 차창 밖으로 섬찟한 폭발음이 잇따라 들려왔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러시아 반대편 서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도로는 이미 피란 차량으로 꽉 차 있었다. 오도가도 못한 채 도로에 갇혀 있기를 몇 시간.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옥사나는 “그래도 당장은 키예프를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며 “어디로 갈지는 그 다음에 결정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개전(開戰)을 선언하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키예프 주민들은 서둘러 피란길에 올랐다. 서부 도시 리비프로 이어진 4차선 도로는 밀려든 차량이 수십㎞ 늘어서 극심한 혼잡을 빚었다. 공항과 버스정류장도 키예프를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 주민은 “오늘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비행편이 결항됐다”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지하철은 그 자체로 거대한 ‘벙커’이자 ‘방공호’였다. 역마다 공습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미국 CNN방송은 “지하철 역이 대피소가 됐다”고 전했다. 인적이 끊긴 도심 광장에서 몇몇 시민들이 모여 기도를 하는 모습도 카메라에 포착됐다. 식료품점에는 물과 비상식량을 구하러 온 주민들로 가득 찼고, 현금인출기와 주유소 앞에도 긴 줄이 늘어섰다. 다행히 결제 시스템이 마비되지는 않아서 신용카드 사용에 어려움은 없었다. 키예프 시당국은 주민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란 가방을 준비해 두고,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대피소로 몸을 피하라”고 공지했다.
러시아의 직접적 위협을 받는 지역은 패닉 상태였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루간스크주(州) 당국은 우크라이나 정부 통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철수령을 내렸다. 러시아군과 친(親)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이 전선을 넘어 쳐들어올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주정부는 “피란 기간 침착함을 유지하고 당국과 경찰, 긴급구조대의 지시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면전에도 대비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원하는 모든 시민들에게 무기를 지급할 것”이라며 “러시아에 맞서 나라를 지킬 준비가 된 시민들은 나와 달라”고 호소했다. 앞서 18~60세를 대상으로 예비군을 소집했고, 민간인이 총기를 소지하고 방위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도 통과시켰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이 수개월간 지속되면서 이미 무장 준비를 마친 주민들도 많다. 한 주민은 “우크라이나군을 믿는다”며 “시민들도 힘을 보태 러시아군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우크라이나 경찰에 따르면 2월 한 달간 총기 10만 개가 새로 등록됐다. 키예프에만 총기 소지자가 7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 팔리고 얼마 남지 않은 탄약과 소총도 무기 사용이 합법화되자마자 품절됐다. 안드리 자고로드니우크 전 국방장관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총을 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