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20일 만에 크림반도 '일사천리' 합병한 러시아, 이번에는?

입력
2022.02.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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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2014년 전광석화 크림반도 점령
이번에도 '명분 쌓기→병력 배치→침공'
'친러' 크림 때와 달리 정부군 반격 나서
전면전에도 서방 군사 직접 개입 어려워

전광석화(電光石火).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을 표현한 말이다. 군사 움직임부터 합병에 이르기까지, 21세기에 한 나라 운명을 뒤흔들고 국경선을 바꾸는 사건이 현실화하는 데 걸린 기간은 단 20일에 불과했다. 모든 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치밀한, 그리고 잘 짜인 각본대로 진행됐다.

여덟 해가 지난 지금은 어떨까. 우선 러시아군이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땅을 밟기까지 일련의 상황은 그야말로 ‘크림병합 시즌2’였다. 푸틴 대통령의 주도면밀 한 사전정지 작업 속에 서방국가는 눈뜬 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상황은 더 나쁘다. 러시아 지상군은 동ㆍ남ㆍ북부 국경지대에서 일제히 밀고 들어오며 우크라이나를 전화(戰火)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일단 현지군이 결사항전에 나서면서 러시아의 ‘일사천리 합병’은 재현되긴 어렵다. 그러나 양측의 군사력 차이는 다윗과 골리앗 수준이다. 여기에 푸틴 대통령이 서방국의 경제 제재에 코웃음만 치고 있어 수도 키예프를 비롯한 주요 도시가 함락당하는 건 시간 문제다.

푸틴의 각본대로 합병된 크림반도

시계를 2014년으로 되돌려보자. 2월 27일 오전 4시,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에 군복차림 무장세력 60여 명이 쳐들어왔다. 건물을 점령한 이들은 크림반도의 분리독립을 요구했다. 이튿날 밤,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국제공항 세 곳도 잇따라 포위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크림반도 민병대’라고 밝혔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들이 러시아군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수개월간의 정치투쟁 끝에 친(親)서방 진영이 친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현지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지에서의 군사력 사용을 주장해오던 터다. 러시아군이 비밀리에 크림반도 곳곳에 포진했을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하루 뒤인 3월 1일, 러시아 상원은 정부의 우크라이나 군사 개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푸틴 대통령은 곧바로 병력 6,000명을 크림반도로 이동시키며 압박에 나섰다. 이후 사흘간 1만6,000여 명의 러시아군이 이곳에 배치됐다. 공화국 내 군사 시설을 비롯, 정부청사와 통신시설, 국경검문소, 여객선 터미널까지 속속 접수했다. 대응 여력이 없던 우크라이나군은 백기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총성 한 발 울리지 않고 크림반도를 손에 넣은 셈이다. 서방국이 부랴부랴 무기금수, 자산동결 등 각종 제재 카드를 꺼내 들고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나섰지만 때는 늦었다.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만드는 작업도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크림공화국 의회는 같은 달 6일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의했고, 11일에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주민 10명 중 6명이 친러 성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민투표에서 실제 합병까지 걸린 시간은 더 짧았다. 독립 닷새 뒤인 16일, 러시아 합병 찬반을 묻는 크림공화국 주민투표가 96.6%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다.

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병합 절차를 추진했다. 이튿날 푸틴 대통령은 크림공화국이 독립 국가임을 인정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고, 다음날인 18일에는 러시아 상ㆍ하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합병조약에 서명했다. 동유럽 지정학을 일거에 뒤집는 사건이 20일 만에 끝난 셈이다. 러시아가 주도면밀하게 판을 짜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당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의 군사 개입은 수주에 걸쳐 면밀히 사전 계획한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속전속결 합병 어려울 듯… 푸틴에 달린 우크라 미래

이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들어온 과정도 2014년과 판박이다. ‘공격 명분 쌓기→인근 병력 배치→침공’ 시나리오는 8년 전 상황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군대를 우크라이나 동부에 침투시키고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거론한 점 모두 과거의 반복이자 데자뷔다. 푸틴 대통령이 쓴 치밀한 각본에 의해 또 다른 침공 드라마가 완성된 셈이다.

문제는 이번에는 대규모 유혈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크림반도 합병 당시 러시아가 물밑에서 침공 판을 짜는 동안 서방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현지 주민들이 러시아의 합병을 환영한 까닭에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꽃놀이패’를 쥐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다르다. 저항이 불가피하다. 벌써부터 나라 전역에 폭발음과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수도 키예프 등에서는 미사일 폭격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군 등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러시아 항공기가 격추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러시아가 3주도 채 안 되는 기간에 크림반도를 손에 넣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물 흐르듯’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긴 어렵다.

다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우크라이나의 군사력 순위는 세계 22위. 미국에 이어 2위를 자랑하는 러시아와의 정면대결에서 승산이 거의 없다. 게다가 러시아의 일방적 공격에도 불구,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등 서방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보호 의무가 없는 탓이다. 러시아 억제력 차원에서 인접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긴 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언제, 어디에서 러시아의 군홧발을 멈추게 할지, 푸틴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우크라이나 미래가 결정된다는 얘기다.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