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가스관 사업 중단·英 러 은행·개인 제재…서방 ‘반러’ 결집

입력
2022.02.23 18:45
독일, 영국, EU, 캐나다, 호주 등 '러시아 제재' 발표
러 고위인사, 금융기관, 기업 등 다수 제재 대상
"현 제재로는 러시아 우크라 침공 막기 역부족" 
국제결제망 퇴출 등 고강도 제재에 역풍 우려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침공에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과 유럽연합(EU), 호주와 캐나다 등 서방 진영이 일제히 러시아 제재를 발표하며 결집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은 독일도 에너지 위기를 각오하고 양국 간 가스관 사업을 중단하는 초강수 제재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당장 일촉즉발의 상황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자칫 세계경제 위기의 역풍을 맞을 수 있어 제재 효과는 크지 않을 전망이다.


독일 ‘노르트스트림-2’ 중단…영국·EU·캐나다·호주도 제재

독일은 22일(현지시간) 러시아와 독일 간 천연가스 공급망인 ‘노르트스트림-2’ 사업 전면 중단을 즉각 발표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이날 “러시아가 심각한 국제법 위반을 저질렀다”며 “(독일) 경제부는 러시아의 조치를 고려해 노르트스트림-2 관련 인증 절차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1,230㎞ 천연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는 러시아 국영 가즈프롬과 유럽 에너지 기업이 110억 달러(약 13조 원)를 투입해 지난해 완공했다. 독일이 가스관 운행을 승인하면 러시아는 천연가스 수출을 통해 연간 수십 억 달러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은 그동안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독일에 승인 절차를 중단할 것을 요청해왔지만 에너지 대란 우려에 독일은 결정을 미뤄왔었다.

영국과 EU, 캐나다, 호주도 잇따라 러시아 경제 제재안을 발표했다. 영국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측근들이 거래하는 주요 은행인 로시야즈은행과 IS은행, 제너럴은행, 프롬스비야즈은행, 흑해은행 등 5곳과 러시아 억만장자인 겐나디 팀첸코와 이고르 로텐베르그, 보리스 로텐베르그 형제 등 3명을 제재 대상에 올렸다.

EU도 우크라이나 돈바스 독립을 승인한 러시아 두마(연방의회 하원) 의원 351명과 이와 관련된 개인과 기관이 다수 포함된 제재안에 합의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은 이번 제재안에 대해 “우크라이나 영토와 주권을 위협하는 개인과 기업이 이번 제재에 포함됐고, 러시아 군대에 자금을 조달하는 은행도 제재 대상”이라며 “러시아가 EU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을 제한하는 데 제재의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도 돈바스 독립을 승인한 러시아 의원과 러시아 은행 2곳과의 금융 거래를 금지하고,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의 모든 금융 거래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호주도 러시아 은행과 에너지 기업을 대거 제재 대상에 올렸다.


서방 집단 제재에도 제재 효과는 미지수

서방이 일제히 제재를 쏟아냈지만 제재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독일의 경우 러시아와의 가스관 사업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뒀지만 이미 수개월째 승인 절차가 지연되면서 손실비용이 시장에 반영됐다. 러시아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당장 없다는 게 중론이다.

서방의 제재 대상에 오른 러시아인과 금융기관들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전환시키기에는 약하다.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대외경제개발은행(VEB)과 군사은행은 국책은행이어서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낮고, 영국과 EU 제재 대상에 오른 상업은행들도 푸틴 대통령의 측근 등 특정집단을 위한 특수은행인 경우가 많아 러시아 경제에 직접적 타격을 주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 제재 대상에 오른 개인과 금융기관 상당수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부터 제재를 받아왔던 터라 효과가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이 발표한 러시아 제재 인사 3명은 모두 2014년 이후 미국이나 영국의 제재 대상이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의 톰 키팅 금융범죄센터장은 “현재까지 발표된 제재로는 러시아의 침공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며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당시 서방의 제재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초강력 제재도 검토…역풍 우려도

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서방이 제재 수위를 높이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서방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퇴출하고, 반도체 등 핵심 첨단산업 기술 수출 통제 등을 적용할 경우 러시아 내수시장에까지 직격탄을 날릴 수 있다.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의 새뮤얼 채럽 연구원은 “러시아가 추가적 군사 행동에 나설 경우 매우 파괴적인 제재가 나올 것”이라며 “가뜩이나 허약한 러시아 경제가 마비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서방이 러시아를 상대로 최고 수위의 제재를 적용하면 △에너지 위기 △국제유가 급등 △높은 인플레이션 등 세계 경제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 영국 싱크탱크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로 에너지 공급 혼란이 발생할 경우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이 1%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연구소는 "전쟁 위험으로 인한 물가 상승과 기업투자 감소 등으로 1970년대 오일쇼크와 같은 수준의 세계 경제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밝혔다.


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