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월 28일 일요일 오후 1시, 대구지역 8개 공립고교생 1,200여 명이 이승만 자유당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건국 이후 최초로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민주화운동이었다.
대구 반월당과 중앙로를 거쳐 경북도청 광장에 집결한 학생들은 결의문을 낭독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맨손에 교복 차림이던 그들의 함성은 들이닥친 경찰 곤봉에 이내 저지됐고, 120여 명이 현장에서 연행됐다. 끌려가는 학생들의 뒤통수에 대고 당시 경북도지사는 '이놈들 전부 빨갱이'라고 고함쳤다고 한다.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학생 다수는 학교에서 농성했다.
제4대 대통령선거(3월 15일)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민주당 장면 후보의 수성천변 유세가 예정된 날이었다. 1956년 대선에서 신익희(민주당 대선후보)와 함께 부통령에 출마, 46.4%의 득표율로 이기붕(44%)을 누르고 당선됐던 그였다. 경북 유권자의 장면 지지율은 54.4%로 36%의 이기붕을 압도했다.
선거 직전 민주당 대선 후보 조병옥이 급사하는 바람에 대통령은 자유당 후보 이승만뿐이었다. 당시 그는 만 86세였고, 자유당은 유고시 권력 승계자인 부통령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승만 정권은 유세 열기를 차단하기 위해 공립고교 강제 등교를 지시했고, 각 학교는 일요일 중간고사를 치르거나 토끼사냥, 영화관람 등을 명분으로 학생들을 학교로 불렀다. 얄팍한 조치의 진원지가 학교가 아닌 정부란 사실을 학생들은 알았다.
'킹크랩' 여론조작을 빼면 거의 모든 부정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된 3·15 선거에서 이승만은 100% 득표율로 당선됐고, 이기붕도 79.2% 지지율(경북 75.5%)로 부통령이 됐다. 한 달여 뒤 4.19혁명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