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목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일을 이틀 앞두고 러시아 외무장관이 “아직 외교적 해법이 남아 있다”며 침공 가능성을 재차 부인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추가로 14개 대대를 배치하는 등 군사적 위협을 멈추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볼모로 삼아 서방으로부터 자국에 유리한 안보 보장을 받아내려는 이중 전략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4일(현지시간) 러시아 관영 리아노보스티통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으로부터 러시아의 안보 요구에 대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의 답변에 대한 준비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라브로프 장관은 “협상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지만 아직 외교적 해법이 고갈된 것은 아니다”라며 서방과의 협상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좋다”고 짧게 답했다. 이를 두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가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나서기보다 서방에 외교적 해법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 위협을 계속 사용하겠다는 신호”라고 풀이했다.
실제 러시아는 이미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미국과 나토의 답변과 관련 “군사적 위험을 줄이기 위한 여러 조치와 신뢰 구축 방안, 군사적 투명성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이 담겨 있었다”며 “답변의 모든 구성 요소들이 러시아가 지난 수년간 추진해온 안보 목표가 반영돼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에 보낸 답변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 시절 폐기한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등 역내 군사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INF 조약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핵미사일 경쟁을 막기 위해 중단거리 핵미사일 배치를 제한하기로 한 약속이다. ‘역내 군사적 긴장과 군비 경쟁을 완화하자’는 제안으로 러시아로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라는 러시아의 핵심 목표도 가시거리에 들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회담을 마친 뒤 “우리가 선택한 길(나토 가입)로 계속 가야 한다고 믿는다”면서도 “우리에게 나토 가입은 절대적 목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토 가입은) 우리에겐 꿈 같은 얘기일지도 모른다”고 포기도 시사했다. 앞서 바딤 프리스타이코 주영국 우크라이나 대사가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침공 위협을 막기 위한 우크라이나 내부의 분위기 변화가 감지된다.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만으로 푸틴 대통령은 전 세계에 존재감을 과시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서방 지도자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외교전에 뛰어들면서 푸틴 대통령의 의중을 듣고자 줄을 서고 있다”며 “지역 내 서방의 영향력을 줄이고 자국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부합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위협이 성과를 보이는 만큼 러시아가 공습 위협을 더욱 높일 가능성도 점쳐진다. 실제 이날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추가로 14개 대대를 배치했다. 13만여 명이던 접경 지역 병력이 15만 명으로 증가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접경국인 벨라루스와의 합동 군사훈련을 명분으로 S-400 지대공미사일, 판치르 대공방어체계, Su-35 전투기 등 최첨단 러시아 무기를 투입해 연일 화력을 과시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주재 러시아 대사는 우크라이나 동부 분쟁지역인 '돈바스' 등지에서 자국민이 피살될 경우 군사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경고하면서 위협 수위를 높였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앞서 미국이 지목한 러시아의 군사 작전 개시일인 16일을 ‘단결의 날’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16일 모든 마을과 도시에 국기를 게양하고 오전 10시 전 국민이 국가를 제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 해외로 떠난 정치인과 기업가들에 대해 귀국할 것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