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에 아이스댄싱...사랑 이야기 아니어도 무대 빛났다

입력
2022.02.1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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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 경기인 아이스댄싱, 새로운 형태의 사랑도 '사랑'
우주비행사·외계인의 만남부터 라이온 킹까지 
"남녀 간 틀에 박힌 사랑 아닌 유대감 보여주겠다"

흰색 줄이 그어진 옷을 입고 우주 비행사를 연기하는 한 선수, 그 옆에는 강렬한 눈빛으로 외계인을 연기하는 파트너가 있다. 우주선에서 나올 법한 기계음과 전자음악에 맞춰 화려한 턴을 선보이는 두 선수는 이번 밸런타인데이에 특별한 '사랑'을 무대 위로 불러왔다.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독창적인 프로그램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만나 인정받고 사랑을 느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녀가 한 팀이 되어 완벽한 무대를 뽐내야 하는 아이스댄싱 종목의 특성상 대개 파트너와의 합을 보여주기 위한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이번 베이징 피겨 경기장은 달랐다. 공포 영화에 나오는 음악에 맞춰 얼음 위를 가르는 선수들부터 외계 행성에 도착한 인간을 연기한 선수들까지 예상치 못한 테마들로 채워졌다.

14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아이스댄싱 프리 댄스 경기에서 미국의 에반 베이츠와 메디슨 척은 우주 비행사와 그가 착륙한 행성의 외계인을 연기했다. 독특한 캐릭터 설정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프리 댄스에서 시즌 베스트인 130.63점을 기록하며 12일 리듬 댄스 점수와 합산해 종합 4위(214.77점)에 올랐다.

척은 경기를 앞두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경기를 하겠다"고 예고하며 "과거에 효과가 있었던 주제나 스타일이 있다고 해서 그걸 계속 추구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대에 서는 선수들이 남녀 간 낭만적인 사랑만 연기의 소재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면서 아이스댄싱 무대에도 다양성이 흘러넘치게 된 셈이다.

이날 아이스댄싱에 출전한 20팀 가운데 3팀에는 자신을 성소수자라고 밝힌 선수들이 속해 있다. 금메달을 따낸 프랑스 대표팀의 기욤 시즈롱은 2020년 한 잡지사와 인터뷰에서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밝혔다. 시즈롱은 무대에 함께 오른 파트너 가브리엘라 파파다키스와 환상의 호흡을 선보이며 리듬, 프리 댄스 점수 합산 1위(226.98점)에 올랐다.

이날 11번째로 연기를 펼친 루이스 깁슨(영국)도 2년 전 밸런타인데이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다. 얼음 위에서 이들은 금빛 장식이 수놓인 의상을 입고 영화 '라이온 킹' OST에 맞춰 열연했다. 종합 10위(191.64점)로 메달권에 들진 못했지만 올림픽 직전 깁슨이 "파트너 라일리 피어와의 무대에선 남녀 간 틀에 박힌 사랑이 아닌 파트너와의 유대감을 보여주겠다"며 했던 다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베이징올림픽은 역대 올림픽 가운데 성소수자 출전 선수가 가장 많은 올림픽이기도 하다. 미국 최대 성소수자 권리 단체인 휴먼라이츠캠페인(HRC)에 따르면 자신이 동성애자, 양성애자, 논바이너리(non-binary) 등 성소수자임을 밝히고 출전한 선수는 총 34명이다. 평창 올림픽 때 15명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34명 중 피겨스케이팅 선수는 10명에 달한다. 그중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으로 출전한 미국의 티모시 르두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소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