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도박 빚보다 충격적인 불법촬영, 가정 지키려면...

입력
2022.02.14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남편의 도박, 동의 없는 신체 촬영으로 결혼 생활 6년 만에 심각한 위기를 맞은 30대 직장인입니다. 허탈함,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몰라 박사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남편에게 도박 빚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재작년이었습니다. 그때는 살면서 한 번쯤 할 수 있는 실수라고 생각했기에 저희끼리 조용히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반년쯤 지나자 이번엔 주식 투자를 하고 싶다고 말을 꺼내더군요. 주식에는 저도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투자금이 점점 커졌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간 투자 내역과 현재 잔액을 가져오라고 엄포를 놓았어요. 그다음 날 연락이 두절된 남편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빠르게 대처해 남편을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응급실에 누워 있는 남편을 두고 유서를 읽는데 참담한 마음이 들었어요. 주식으로 잃은 돈을 만회하려고 도박에 손을 댔고, 도박 자금을 모으려고 사채까지 썼더군요. 도박 빚만 5억 원가량 됐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남편이 그동안 제 몸이나 저희의 성관계 장면을 휴대폰으로 몰래 촬영해서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가끔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을 하는 소리를 듣고 물어보면 남편은 '잘못 들었다'고 했었어요. 남편에게 설명을 요구했더니 저 외에 다른 사람을 촬영하거나 이를 공유한 적은 없고, 단지 본인이 원하는 만큼 부부 관계를 할 수 없어 혼자 보려 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그동안의 사진과 영상을 다 지우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 집, 제 가족 앞에서도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어요.

친정은 가정 불화가 심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아버지의 외도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집에서 언어 예절, 식사 예절, 생활 태도를 문제 삼고 돈과 폭언, 폭력으로 다른 가족을 통제하려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심기에 거슬리게 말한다며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제가 살갑게 굴면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러고 있네"라거나 "10원 한 장 벌어올 수 없는 새끼들은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어요.

20년을 버티다 빈털터리로 나온 엄마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세요. 엄마는 어렸을 때 아버지 험담을 하면 제가 공감해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셨는데, 지금도 저를 만날 때면 먼저 자신의 어려움을 하소연하십니다. 본인도 힘드시기에 제가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 일이 있기 전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다정하고 유쾌한 성격의 남편은 저에게 잘했고 저도 남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지만 둘 다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불행했던 제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낮은 자존감을 키워주고, 밝아진 것 또한 남편의 지지와 사랑 덕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도박 빚도 함께 노력해 해결해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몸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이제 남편에게 저는 어떤 존재인가, 존중받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 모두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본인 노후 자금을 처분해 급한 불은 일단 끈 상태입니다. 남편의 급여는 채무 변제에만 쓰고 둘의 생활비는 제 급여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당연히 이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힘든 일들을 이겨낸 주변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가정을 지키는 쪽으로 마음먹은 상태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으로 인해 다음은 어떤 일이 생길지,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유민영(가명·34·회사원)

민영씨, 당신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남편과의 관계가 흔들리면서 지금 마음이 얼마나 많이 괴로울까요. 도박을 하고 큰 액수의 빚을 졌다는 사실 하나도 감당하기 벅찬데, 몰래 내 몸을 찍었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남편이 저지른 일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잘못된 행동이에요. 여기서 남편의 행동이 왜 잘못인지를 논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남편이 잘못했으니, 이혼하세요'라는 조언은 민영씨 상황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이혼을 결정했다면 오히려 민영씨의 마음이 이렇게 괴롭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당신의 심란하고 어지러운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칼럼을 씁니다.

누군가는 민영씨가 지금 괴로운 이유를 남편이 반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속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것도 중요한 이유이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당신이 고통스러운 건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아요. 당신은 그보다 남편이 내 몸과 성관계 장면을 몰래 촬영했다는 사실에, 나를 오로지 '성적 대상'으로만 여겼다고 느끼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부부는 성적 욕구를 느끼고 해결하는 대상이지요. 그런데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사랑하는 성적 대상'입니다. 존중, 배려, 사랑이 빠진 채로 그저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처럼 나를 대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거지요. 차라리 남편의 휴대폰에서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포르노그래피가 나왔다면 이렇게 충격받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신은 실제로 남편이 도박 빚을 크게 진 사실을 알고도 함께 갚아 나갈 생각을 했어요. 적은 액수도 아니고 당신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도요. 그런데 남편이 허락 없이 내 몸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고 이혼까지 생각했죠. 그만큼 남편이 당신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대하고 당신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로서 의미가 상당히 컸던 거예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당신에게 돈(남편의 빚)은 큰 문제이기는 하나 관계를 끊는 이혼을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민영씨는 어렸을 때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감정적으로 결핍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조건 없는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여길 만한 경험이 부족했어요.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때때로 억울함과 분노를 느꼈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예의범절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 중에 일부는 예의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을 숨기고, 상대를 굴복시키려 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가 나쁜 말을 쓸 때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다'며 가르쳐주는 대신, '애가 나를 무시하네. 너 아빠(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라고 지나치게 화를 내거나 가정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체벌을 하는 부모인 거지요. 게다가 아버지는 예의범절을 이야기하면서 본인은 외도를 합니다. 당신이 아버지와 잘 지내기는 너무 어려웠을 거예요. 어머니도 이런 아버지와 살며 당신에게 나눌 마음의 여력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반면 남편은 당신에게 항상 따뜻하게 대해 주고 당신이 스스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줬던 것 같아요.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런 사랑에 목말랐던 당신에게 남편은 너무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을 거예요. 남편과의 관계는 당신의 결핍을 메워줬을 겁니다. 당신이 이혼을 생각하게 된 계기도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그저 욕정의 대상으로만 봤다고 느꼈기 때문이었고, 당신이 이 결혼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도 지난 몇 년간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의 경험 때문일 거예요. 당신에게는 배우자와의 사랑이라는 이 끈끈한 유대 관계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쉽게 이혼하라 말할 수 있겠지만 저는 남편 옆에 있기로 한 당신의 마음을 그래서 이해합니다. 아픔과 취약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잣대로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죠.

다만 저는 이 결혼 생활을 지속하려면 남편분의 치료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배우자의 몸을 몰래 찍은 행동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민영씨가 해명을 듣고 용서해주고 그냥 넘어갈 게 아니에요. 본인도 모르는 심리적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남편의 이런 어긋난 성적 행동에 대한 병적 원인이 있는지 진단을 받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치료를 받는 과정이 꼭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도박 중독에 대한 치료도 반드시 병행해야 합니다.

남편은 어떤 욕구나 충동을 조절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어 보입니다. 중독은 특정 대상이 주는 긴장과 흥분, 쾌감을 잊지 못하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도박에 중독되는 것도 돈을 많이 땄을 때, 그 순간의 짜릿한 감각을 잊지 못하는 것이죠. 이런 성향은 성적 욕구나 충동을 느꼈을 때 부인의 몸을 몰래 촬영하는 이상 행위와도 아예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해 보여요. 아마 억울한 마음이 클 거예요. 민영씨는 마음이 따뜻하고, 성실하고, 사회의 질서와 인간의 도리를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우리가 어찌 부모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민영씨가 직접 선택한 배우자의 일탈과 잘못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어요. 철석같이 믿었던 상대에 대한 신뢰도 깨졌지요. 보통 사람이 이런 일을 겪으면 굉장히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가 치밉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상담이나 치료가 도움이 될 거예요. 또는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별다른 해결책이 나오지 않더라도 말이죠.

남편의 도박 중독, 어긋난 성적 행동은 치료와 교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결혼 생활이 유지되려면 남편이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해요. 이런 노력 없이 문제를 덮으면 남편의 중독 성향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단순히 결혼 생활이 끝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받을 상처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거예요. 남편이 본인의 문제를 제대로 인정하느냐와 자신의 치료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력하느냐, 아내에게 준 상처의 회복을 위해 진심으로 애쓰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혼 생활을 유지할지 이혼을 할지 여부를 신중하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쪽이 넓은 아량으로 봐주는 방향으로 문제를 덮지 말고 문제의 원인을 찾고 치료하는 방식으로 무너진 신뢰와 믿음을 다시 쌓아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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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송옥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