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말 미국 연방대법원의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이 은퇴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는 올해 83세로, 1994년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지명받았으며 올 6월까지 재직할 것으로 보인다. 대법관으로서는 진보주의자이면서도 온건하고 타협지향적이었다. 소수자 우대, 총기 규제, 낙태 이슈에는 진보적이었지만, 형사범죄에는 강경한 판결을 해왔다.
사실 브레이어 대법관은 2020년 대선 이후 주위로부터 은퇴 압력을 상당히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진보적이었던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트럼프 대통령 시절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보수적 배럿 대법관으로 교체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연방대법관들은 대개 자신과 이념 성향이 비슷한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을 때 은퇴했고, 대통령도 새 대법관을 지명할 때 이념적 동질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왔다. 따라서, 브레이어 대법관 입장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하기 전, 그리고 연방상원의 다수당이 민주당일 때 은퇴를 해야 새로운 진보 성향 대법관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관 자리가 비면 흑인 여성을 지명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그가 인사문제에서 다양성을 중요시해 왔던 점을 생각하면,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 여성 대법관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후보는 3명 정도이다.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의 잭슨 판사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연방순회법원의 차일즈 판사는 연방상원의 인준을 통과했던 경험이 있어서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의 크루커 대법관도 있다.
흑인 여성 부통령에 이어 흑인 여성 대법관도 나올 것으로 알려지자, 공화당 일부에서는 불평의 목소리도 나왔다. 일반적으로 대통령이 대법관을 지명하면 야당은 의례적으로 '부적합' 의견을 발표했었다. 지명자의 경험이 부족하다든지, 주요 판결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종을 문제 삼았다. 텍사스 출신 연방상원의원인 테드 크루즈는 "대법관으로서의 자질이 제일 훌륭한 사람을 지명해야지,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명하면 안 된다"고 평했다.
이러한 식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민주당 의원들은 특정한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누가 지명되든 자격 있는 흑인 여성이면 다 환영한다"는 분위기이다. 건국 이후 지금까지 연방대법원 대법관 중 백인은 108명이었지만, 흑인은 고작 2명뿐이었다. 또, 남성은 총 105명이었지만 여성은 5명에 불과했었다. 흑인 여성 대법관이 나온다면 연방대법원이 일반 국민들과 보다 비슷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많은 흑인 청소년들의 훌륭한 롤모델이 되어, 인종 갈등의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보적인 흑인 여성 대법관의 등장에 마냥 축배를 들기에는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 너무 암울한 미래가 펼쳐질 전망이다. 프린스턴대학 연구팀은 최근 시뮬레이션 연구를 통해 미래 연방대법원의 이념 성향을 예상해 보았다. 대법관의 은퇴 시기와 대통령의 지명 방식이 지금처럼 전략적이라고 가정하고, 대법관 은퇴와 대선 결과를 확률적으로 예측한 다음, 매년 1,000번의 시뮬레이션으로 대법원 이념을 예상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보수 성향 대법원은 최소 2040년대까지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이며, 2050년대가 지나서야 대법원의 이념이 바뀔 가능성이 절반 정도 될 것이란다. 보수 대법관들이 너무 젊고, 그들도 '전략적 은퇴'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연방대법원의 대결은 조만간 끝나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