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란 무엇인가

입력
2022.02.12 04:00
19면
<1> 스포츠워싱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올림픽이 대체 뭘까. 올림픽은 4년에 한 번 각국의 대표선수들이 모여 갖가지 스포츠 경기를 19일 내외로 치르는 행사다. 하계와 동계로 나뉘어 개최되기에 2년에 한 번은 열린다고 봐야 한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2020년 도쿄 올림픽이 한 해 미뤄져 2021년에 개최됐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도쿄에서 멀지 않은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머나먼) 베이징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으니, 약간의 피로도는 있는 것 같다. 작년에 왔던 올림픽이 잊지도 않고 또 온 것이다. 그사이 더 기세가 등등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시국에서.

올림픽이란 무엇인가. 올림픽을 액면대로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 믿는 순진무구한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올림픽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피아 기간만큼은 도시 국가 사이의 전쟁과 도발을 멈췄다고 하나, 지금의 올림픽에서는 꼭 지켜야 하는 불문율은 아닌 듯하다. 공교롭게도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 기간에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한 바 있으며, 2022년 현재에도 우크라이나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중이다.

올림픽의 역사, 나치 선전장에서 냉전시대 세력 과시 수단까지

실제 올림픽은 세계 평화의 가능성보다는 그것의 어려움과 불가함을 확인시켜준 적이 많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정치 선전장이 되었으며 올림픽이 끝나고 3년 후, 나치는 베를린에서의 선전대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한 거대한 전쟁을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금메달은 독일인도, 백인도, 식민 지배 국가의 국민도 아닌, 피식민지의 청년 손기정의 것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어느 정도 복구되어가던 시기, 같은 독일 땅에서 열린 1972년 뮌헨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불행한 올림픽으로 꼽힌다.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선수촌에 잠입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살해하고 다른 11명의 선수로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구출 작전에서 인질 전원이 사망하고 만다. 이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는 해결의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올림픽이란 무얼까. 냉전 시대 올림픽은 각 진영의 세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올림픽 직전 해에 발발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여파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 국가들이 불참한 채 치러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산권 국가에서 열린 올림픽에 같은 공산국가인 중국도 불참을 결정한 것이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사태는 1989년 소련 군대가 철수함으로써 종식되었으나, 역사는 2021년 미군의 철수로 거의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다. 마치 올림픽처럼.

다음 올림픽은 역사의 반복을 증명하듯 다시 미국에서 열렸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마찬가지로 동구권 국가들의 보이콧이 있었다. (중국은 모스크바와는 다르게 LA에는 선수단을 보낸다). 끝을 모르고 치닫던 냉전의 분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이르러 완화되는 조짐을 보인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릴 때 소련은 붕괴한 상태였고, 소비에트 연합은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경기에 나선다. 같은 올림픽에서 미국은 자본주의 스포츠의 총아라 할 수 있는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역대급 선수들을 불러모아 ‘드림팀’을 구성한다. 나이키 광고 모델인 마이클 조던이 코트를 휘젓는 모습은 마치 미국의 승리로 끝난 냉전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앙코르 공연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돈이 돌고 도는 올림픽의 상업화

올림픽이란 무엇인가. 열전과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올림픽은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상업화가 올림픽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대회로 기억된다. 그간 정권과 체제의 홍보, 국가의 결속 등에 훌륭한 수단이 되었던 올림픽이 막대한 중계권과 그에 못지않은 광고 수익을 기반으로 한 다국적 기업의 각축장이 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코카콜라는 몸에 그다지 좋지 않을 탄산음료를 주된 상품으로 내놓는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최대 규모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의 후원사로 우뚝 선다.

이후의 올림픽은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의 비리로 얼룩진다. 2000년 시드니부터 최근 대회에 이르기까지 ‘검은돈’의 의혹에서 자유로운 올림픽은 얼마 없다. 최근의 올림픽은 대규모 적자와 환경 파괴 문제도 지적받는다. 이른바 ‘올림픽 비즈니스’라 불리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비리로 개최지가 결정되고, 개최 도시의 천문학적 적자를 해당 도시의 시민이 내는 세금으로 메우는 것이다. 그렇게 세운 시설은 대회 후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하고 애물단지가 된다. 특히 동계 올림픽의 경우 설상 시설을 위한 벌목과 천연 눈이 아닌 인공 눈의 사용 등으로 환경 파괴의 정도가 심하다.


올림픽이란 대체 뭘까.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을 개최하려는 도시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행사는 정부의 치적을 쌓고 세력을 공고히 하는 데 효용이 크다. 2014년 소치 올림픽과 2022년 베이징 올림픽은 그 확연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소치 올림픽은 푸틴 체제의 강화를 위한 땔감이 되었고, 베이징 올림픽은 중국을 둘러싼 인권 논쟁을 희석하는 맹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중국은 이번 올림픽 개막식의 최종 점화자로 신장 위구르 출신 선수를 등장시켜, 위구르족 인권 문제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실재하는 폭력을 연출된 상징성으로 덮을 수 있다는 오만이었을까. 그 오만함까지 작디작은 성화로 모두 가릴 수 있다 믿는 듯한 개막식의 풍경이었다.

올림픽이란 무엇인가. ‘스포츠워싱(Sportswashing)’이라는 말이 최근에 생겼다. 스포츠 팀을 후원하거나 운영하고,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국가나 조직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는 행위를 뜻한다. 100년이 훌쩍 넘는 올림픽의 역사 자체가, 과감히 말해 스포츠워싱의 역사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효과적인 세탁을 위해서는 이벤트의 흥행이 중요하고 흥행은 성적이 좌우한다. 개최국이나 강대국에 유리한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렇게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는 할리우드 액션이 통했고, 2014년 소치에서는 러시아가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가져갔고, 베이징에서는 석연치 않은 실격이 이어진다.

물론 우리나라도 스포츠워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군사정권의 홍보 도구로 알뜰히 쓰일 계획이었음은 물론이다. 해당 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호성적을 거두는 데 몇몇 종목에서의 편파적 판정이 한몫했음은 많은 스포츠 팬이 인정하는 바다. 2022년 베이징에서의 비상식적 판정은 훗날 어떻게 기억될까? 그 나라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그저 수치로만 기억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올림픽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대체 뭐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에 환호하고 좌절하고 위로받고 박수를 보내는 것일까. 스포츠는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국제 정세의 흑막과 권위주의 정부의 속셈 따위와는 별개로 하나의 종목에 훈련을 거듭한 선수들의 몸과 몸짓은 탁월하고 또한 아름답다. 그들이 벌이는 기록과 순위 경쟁이 흥미롭고 또한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스포츠워싱이 들킬 수밖에 없는 싸구려 마술쇼라면 스포츠 정신은 쇼를 진실되게 바꾸는 마법이다. 바로 이전 게임에서 공분을 산 판정의 피해자가 다음 게임에서 전략을 바꿔 깔끔하게(?!) 금메달을 쟁취해버리는 장면이 바로 마법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찢어진 손바닥을 몇 바늘이나 꿰매고 결승에 진출하는 선수가 마법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이것은 마법이 아니다. 최선의 정신과 최고의 기량이 만든 스포츠다. 스포츠 정신이다.

올림픽은 곧 스포츠 정신이다. 스포츠 정신이어야 한다. 물론 올림픽은 세계 평화의 제전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반대이기도 하다. 올림픽은 미디어 기술력의 전시장이자 다국적 기업의 홍보 부스이기도 하다. 이 모든 정의는 올림픽이 스포츠 정신을 토대로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스포츠 그 자체의 감동에 늘 알면서도 당한다. 2022년 겨울에도 결국에는 스포츠에 당하고 있다. 이 스포츠의 힘 앞에서 우리는, 겸허한 환호를 보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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