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 나의 소개는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는 작가'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예능 방송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해 대중문화와 사회에 관한 칼럼을 쓴 지는 10년이 넘었고, 세 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영화 관련 취재 기사와 인터뷰 기사, 기획 기사를 써왔고, 웹 예능과 배우 인터뷰 콘텐츠의 구성 작가로도 일했다. 5년 전에는 첫 드라마를 썼다. 4년째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꾸준히 오디오용 대본을 쓰고 있고, 공식적으로는 처음 쓴 단편 소설이 실린 앤솔러지 단편집이 지난달 출간됐다. 소속 없는 프리랜서 작가로서 글을 쓰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라도 마다하지 않은 결과다. 하고 싶고 쓰고 싶은 게 지나치게 많은 나의 욕심과 하나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성정에 이런 잡(雜)스러움이 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 다양한 작업 중 가장 특별했던 장르를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스탠드업 코미디 쇼의 대본이다.
4년 전, 내가 올라가서 직접 공연을 해야 하는 무대를 위한 대본이었다. 박나래, 유병재 등 코미디언이나 전문 방송인의 쇼가 넷플릭스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스탠드업 코미디가 익숙한 장르가 된 것 같다. 해외, 특히 미국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는 쇼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장르다. 심야 토크쇼 진행자 대부분은 스탠드업 코미디언 출신이다. 오직 입담으로만 승부해 온 이들에게 시사, 교양, 사회, 대중문화 전반을 아우르며 소통하고 풍자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
4년 전의 내게는 그 정도까지 무겁고 중요한 주제가 던져진 것은 아니었으나 '여성이 웃기고 여성이 웃는다'는 멋진 슬로건이 걸린 무대에 선 이상, 책임감만은 막중했다. 수많은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보고, 분석하고, 대본을 쓰고, 다듬었고, 많은 시간을 들여 연습해 무대에 섰다. 첫 무대치고는 꽤 선전했다고 자신하지만, 이후로는 기회와 시간이 없어서 두 번째 무대는 4년째 미뤄지고 있다. 그래도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또 도전하고 싶다.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는 유머를 녹여 글을 쓰는 일이 즐거웠고, 계산해 둔 타이밍에 맞춰 터지는 웃음이 짜릿했다. 무엇보다 정말 어려웠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스탠드업 코미디 대본을 쓰고 싶은 마음은 어려운 문제를 몇 번이고 다시 풀며 정답에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비슷한 것도 같다.
데버라 밴스(진 스마트)도 코미디가 어려웠을까.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 '나의 직장 상사는 코미디언' 속의 코미디언이 바로 데버라 밴스다. 1970년대 시트콤으로 시작해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전설이 된 이 여성은 일흔 언저리의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에 오른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거대 호텔 체인의 한 극장이 바로 데버라 밴스의 일터다. 대중이 가십으로 알고 있는 슬픈 개인사를 웃음으로 승화하며 매일 똑같은 레퍼토리로 무대에 오른다. 그래도 매번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웃음은 선사할 수 있으니, 그에게 코미디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리를 시험하고, 데버라에게 그 시험은 낡은 코미디와 함께 무대를 떠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찾아온다. 때마침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부적절한 몇 마디의 농담으로 코미디 전문 작가 일자리를 잃은 에이바(해나 아인바인)가 절벽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데버라 밴스라는 지푸라기를 붙잡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은 재기를 위해 한 팀이 된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은 훌륭하고 사랑받은 수많은 버디 무비, 듀오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그러하듯이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그대로 밟아간다. 나이와 경험, 삶의 배경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차이 때문에 티격태격하다가도, 서로에게 닮은 점을 발견하고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매력을 알아가며, 살아온 삶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주면서 친밀해지는 과정을 통해 관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로맨스가 빠졌을 뿐, 개성 있는 인물을 통해 이 과정을 충실하게 밟아나가는 이야기는 원래 재미있다. 그래서 공식인 것이다.
어마어마한 부와 인기를 가진 데버라는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인 노년 여성이다. 끊임없는 시술과 관리를 통해 화려한 외모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텅 비어 있는 시간에 찾아오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을 일을 통해 지우려 한다.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빚더미에 오르게 생긴 에이바는 일상생활과 코미디 모두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지만,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말을 쏟아내며 그게 옳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여긴다. 그런 태도로 살아가느라 외톨이가 됐고 그래서 슬프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20대 여성이 에이바다.
데버라에게 에이바는 능력도 없으면서 입바른 소리만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웃는 코미디의 중요함을 모르는 철부지다. 에이바에게 데버라는 자신을 희화화하는 유머를 던지면서도 수치스러운 줄 모르고,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코미디로 막대한 부를 모은 한물간 늙은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나의 직장 상사는 코미디언'은 이야기한다.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 함께하는 시간을 쌓아간다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은 저절로 생겨난다. 그게 바로 이 드라마가 말하는 '관계'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이 데버라와 에이바의 공통분모이자 서로를 이해하는 언어인 코미디를 통해 세대 차이를 다루는 방식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다. 에이바가 데버라의 코미디에 웃는 관객의 수준을 무시하자 데버라는 이렇게 말한다. "LA나 뉴욕에 안 사는 사람들이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네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들보다 가치가 없진 않아." 에이바는 데버라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 데버라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데버라가 어떻게 자신만의 역사를 써왔고, 어떤 코미디를 했었는지를 보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뀐다. 나이가 든다는 것, 유명해진다는 것,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여성으로 대중문화업계에서 일해 나간다는 것의 무게를 조금쯤이나마 나누어 짊어져 보면서 알게 된다. 데버라가 얼마나 뛰어난 코미디언인지, 동시에 얼마나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인지 말이다. 데버라와 에이바는 서로 통하는 유머라는 같은 언어를 쓰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이해의 시간을 거쳐 두 사람은 변한다. 서로를 만나 세계가 넓어졌으므로 길은 많아졌고, 이전에 걷던 길을 다시 걸을 이유가 없다. 새로운 길 위에 서면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에이바로 인해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 눈감았던 일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 데버라는, 젊은 시절에 자신 또한 겪었던 성희롱을 감내하며 무대에 서는 후배 여성 코미디언을 위해 나선다. 모두를 내쫓을 수는 없지만 한 명은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데버라의 선언은 짜릿하고 감동적이다. '미투'의 시기를 지나온 여성들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에이바는 데버라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 법을 다시 배웠다.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내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법을, 어른으로서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지는 법을, 평생 지켜온 규칙을 아끼는 사람을 위해 깰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들처럼 서로를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우리는 건강한 관계 그리고 성장이라고 부른다. 복잡한 방식으로 너무도 다른 두 여성이, 그럼에도 사랑하는 일과 세계를 지키며 쌓아나가는 관계를 보는 일은 좋은 성장 드라마만큼이나 뭉클하고,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만큼이나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경험이다.
공식적으로 마지막에 배치된 갈등과 오해의 순간, 데버라는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마음을 바꿔 2,499번 반복된 레퍼토리가 아닌 새로운 이야기로 2,500번째 쇼를 채운다. 그간 웃음으로 감춰 두었던 삶의 진실을 녹여 에이바와 함께 쓴, 두 사람이 모두 자랑스러워하는 이야기다. 쇼를 시작하는 데버라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나의 작은 쇼를 떠올렸다. 지난 4년간 바뀐 생각과 관점, 나의 세계를 녹여 새로운 대본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유머를 이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졌다. 유머를 이해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만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고, 새로운 언어가 통하는 이전에 없던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그 세계에서 웃기고 웃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에이바가 데버라에게 보낸 진심 어린 칭찬을 떠올린다. "당신은 누구라도 웃길 수 있어요. 당신은 무엇이든 재밌게 만들잖아요." 코미디언도 아닌데, 여전히 내가 받고 싶은 최고의 칭찬은 이런 문장이다. 이런 칭찬을 받는 글을 쓰고 싶다. 데버라와 에이바 덕분에, 오래된 '스탠드업 코미디' 폴더를 연다. 열며 인사를 전하고 싶다. 스탠드업 코미디 쇼의 마지막 인사처럼. "생큐, 데버라! 생큐, 라스베이거스! 좋은 밤 되세요." 아침에 읽었더라도 좋은 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