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배우가 장애를 연기할 때

입력
2022.02.08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는 스크린 안과 밖에서 장애를 둘러싼 세상의 편견과 맞선다. 영화는 청각장애인(농인) 부모와 오빠를 둔 10대 소녀 루비(에밀리아 존스)가 노래에 재능을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코다는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비장애인, 청인을 가리키는 국제 용어다.

영화 속 캐릭터는 전형적이지 않다. 루비의 엄마는 음대에 진학하려는 딸의 꿈을 선뜻 응원하지 않는다. 청인으로서 가족의 통역사 역할을 했던 딸이 사라지면 당장 나머지 가족의 생활이 힘들어질 것을 먼저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딸, 잘 가.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떠나서 너의 꿈을 마음껏 펼치렴"이라고 말하지 않는 엄마라서, 다소 철없고 이기적이라서 반가웠다. 영화는 여성이자 장애인이고 엄마인 그를, 너무 쉽게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피해자로 묘사하는 그간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의 진가는 스크린 안에 머물지 않는다. 코다에서 농인으로 나오는 루비의 엄마(말리 매트린), 아빠(트로이 코처), 오빠(다니엘 듀런트)는 모두 실제 농인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이 농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장애인 배우들이 수화를 배워 연기했을 것이라 여겼다. 장애인이 배우가 되기 어렵다는 전제가 깔린, 비장애인 중심의 세계에서 살기에 갖는 편견이다. 비장애인 배우가 비장애인의 삶을 연기하듯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농인 배우가 농인 배역을 맡는 게 할리우드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 듯하다. 유명 배우인 말리 매트린을 제외한 루비의 아빠, 오빠 역은 비장애인 배우가 연기할 뻔했다고 한다. 말리 매트린이 "그러면 나도 이 영화 안 하겠다"고 맞선 뒤에야 농인 배우에게 배역이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말리 매트린은 아카데미 시상식 최연소, 농인 최초의 여우주연상 수상자다. 농인 배우의 풀이 충분했고, 농인 배우가 연기하면 수화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으며 농인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비장애인 배우의 캐스팅을 우선 고려한 것이다.

할리우드는 현재 다양성이 최대의 화두다. 인종, 젠더 논란으로 라틴계 백설공주와 흑인 인어공주가 탄생했고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콘텐츠도 늘어나고 있다. 장애를 가진 캐릭터의 부족,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의 TV쇼 등 주요 영상 콘텐츠에 등장하는 장애인 캐릭터 가운데 단 5%만 장애인 배우가 연기한다.

국내 사정은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다. 국내 장애인 수는 263만여 명으로 추산되나, 드라마와 영화에서 장애인 배우는 물론이고 장애를 가진 캐릭터조차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장애인 배우를 이야기할 때 열에 아홉이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온 피터 딘클리지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그가 훌륭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만큼 장애인 배우를 보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존재를 더 이상 지우지 않고, 덧칠하지 말고, 더 많이 보여주자. 콘텐츠 다양성을 확보하는 제일 쉽고 빠른 길이다.


송옥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