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된 '홀로코스트 만화'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된 사연

입력
2022.02.05 16:00
아트 슈피겔만 만화 '쥐'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교육과정 배제 결정에 '역주행'
"홀로코스트 부정론 배후 의심"

유대계 미국인 작가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Maus)'의 위상은 독특하다. 미국에서도 만화는 곧 슈퍼히어로로 통했던 1980년대에 연재된 홀로코스트 만화는 책으로 엮여 출간된 후 언론과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주로 성인 독자 대상의 '예술 만화'를 가리키는 '그래픽 노블'이란 명칭이 유명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물론 '쥐' 그 자체로도 문학 작품의 일종으로 대우를 받으며 199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유대인의 이야기를 생존자의 자식이 그대로 다뤘다는 점 때문이다. 생존자인 부친(블라덱 슈피겔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늘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그 영향으로 고집불통에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되지만 아들인 주인공(아트 슈피겔만)은 부친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부친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남긴 '불가항력의 재앙'과도 같았던 홀로코스트의 잔학성과 비극성이 더욱 부각된다.


교육과정 퇴출 사건이 부른 만화의 '역주행'



역사에 남은 이 작품이 갑작스레 '검열 대상'이 됐다. 지난달 26일 미 테네시주 지역 언론 '테네시 홀러'에 따르면, 1월 10일 미국 남부 테네시주 맥민 카운티의 교육위원회 위원 10명은 만장일치로 '쥐'를 8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에 상응) 교과 과정에서 삭제하도록 결정했다. 교육위원들이 내세운 삭제의 주 원인은 해당 책에 욕설과 노출, 폭력적 요소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전적 기록을 만화로 만든 것임을 생각하면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교육위원들의 주장을 보면 "작가는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의 작품을 교과 과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거나 "목을 매달고 아이를 죽이는 모습을 묘사를 하는 것은 역사 교육에 불필요하다"는 등의 이유가 담겨 있다. 실제로 '쥐'를 소재로 가르치는 교사들이 "잔혹한 현실을 드러낼 뿐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반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금지를 하면 더 퍼트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쥐'는 22일 관련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는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판매순위 1,000위 밖에 있었던 책이었지만, 한 주가 지난 후 지난달 30일 집계한 주간 판매량에서 '쥐' 완결판은 3위, '쥐' 1권은 4위에 올랐다. 모두 순위권 첫 진입이다. 아마존이란 사이트가 생기기도 전에 나온 책이 '역주행'을 했다. '쥐'는 출고량이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현재 주문하면 3월 초 이후에나 받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탈정치' 탈 쓰고 '표적 퇴출'하는 보수주의 금서 운동


욕설과 폭력, 노출 등 교육위원회가 내건 표면상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보수 성향이 짙은 테네시주 교육위원들의 움직임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으로 해당 소식을 전한 '테네시 홀러'는 "위원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교육계에서 벌어지는 보수 진영의 '금서 운동'을 고려하면 왜 하필 이 시점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잘만 가르치던, 내용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책을 왜 이제 와서 문제 삼느냐는 얘기다.

여러 보수 시민단체 네트워크가 진행 중인 금서 운동은 겉으로는 "교육 현장에선 특정한 입장을 대변해선 안 된다" "어린 학생들에게 자극적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 '탈(脫)정치적'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인종 차별과 식민지배 비판, 성 정체성에 관한 내용 등을 다룬 책을 학교 교육 과정의 대상으로 하고 학교 도서관 대출 도서 등에서 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실제 이런 운동이 보수 유권자의 결집에 효과를 발휘해 지난해 버지니아주 주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등 성과를 내자, 내친 걸음 비슷한 운동이 온갖 보수 의제로 확산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 가운데 '홀로코스트 부정론'도 있는 것이다. 지난달 10일에는 미국 중서부 인디애나주의 공화당 소속 주의회 상원의원이 '분열적 교육 금지법'을 옹호하면서 "나치즘과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괜찮지만 특정한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가 사과하기도 했다.


슈피겔만의 경고 "홀로코스트 부정에서 끝나지 않을 것"


'쥐'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은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진행한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 조치가 "터무니없고 근시안적"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는 '쥐'의 교육 과정 퇴출 사태를 "적색 경보"라고 칭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홀로코스트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원치 않는) 사실을 부인하려 할 것이다."

올해 73세인 슈피겔만은 일부 교육계 인사들이 벌이는 '금서 운동'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미국적 소설의 근원'으로 꼽히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소설이 나온 직후인 1885년 욕설과 거짓말, 정규 교육 과정에 대한 조롱 등을 근거로 여러 학교에서 금서로 지정됐다.

21세기에는 정반대로 이 소설에 나오는 흑인을 비하하는 말을 고치라는 취지에서 교육 과정에서 빼라는 요구가 나왔다. '캔슬 컬처'라는 단어는 최근 진보 운동가들의 공격적 문화 운동을 규정하는 데 쓰려고 우파 진영에서 만든 용어다. 하지만 그런 행동 양식 자체는 역사가 오래됐고,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으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이라는 게 슈피겔만의 설명이다.



"성인만을 위한 책? 읽고 지혜 얻는 모든 독자의 것"


슈피겔만은 만화가다. 즉, 교육 현장의 '검열'에 익숙하다. 인터넷 라디오 '데모크라시 나우'에 출연한 슈피겔만은 "만화는 특히 시각적 묘사를 하기 때문에 검열 운동의 주요한 표적이 되곤 했다"고 밝혔다. '쥐'가 폭력적이고 적나라한 묘사를 했다는 지적도 사실 옳다고 말했다. 슈피겔만 자신도 '쥐'는 성인을 위한 만화라고 여러 차례 밝혔고, 처음에는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된 것을 두고 "애써 성인을 위한 만화를 그렸더니 결국 청소년 도서 취급받는구나 싶어 기분이 나빴다"고도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쥐'에 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쥐'를 스스로 찾아 읽고 의미를 찾고 지혜를 쌓은 청년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만화는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슈피겔만의 말대로 청소년기에 '쥐'를 접한 이들은 이 살아 있는 고전을 '퍼트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청년 운동 모임인 '내일의 투표자들'은 '금서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텍사스와 버지니아주에서 흑인 노예제를 다룬 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와 '쥐'를 배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테네시주 녹스빌에 위치한 만화가게 점주 라이언 히긴스는 급히 '쥐' 100부를 주문한 후 트위터에 "기부받고 싶은 학생들은 메시지를 달라"고 밝혔다. 만화책 기부를 위한 특별 모금 프로젝트에는 10만 달러(약 1억2,000만 원)가 모였다.

어렸을 적 만화 마니아였던 히긴스는 '쥐'를 처음 읽었던 시점을 "눈이 떠졌다. 가슴 아팠고, 감동적이었고, 내가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창을 열었다"고 회고하며 "모든 학생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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