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그룹', 즉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학생 운동을 한 정치 세력. 20여 년 전 여의도의 '새 피'로 등장한 이들은 줄곧 진보의 간판이자 권력의 핵심이었다. 꽃이 이울고 해가 지듯, 이들도 어느새 '고인 물'이라 불리는 처지가 됐다.
이재명 대선후보의 지지율 정체로 민주 정부의 대가 끊길 것이란 두려움이 더불어민주당을 휘감은 지금, 86 용퇴론이 반짝 부상했다 흐지부지되고 있다. 86은 그간 퇴진을 요구받을 때마다 '대안 부재'를 앞세워 버텼다.
그런 '선배'들을 바라보는 장경태, 장철민 의원과 이동학 최고위원 등 1980년대생 민주당 정치인 3명의 생각을 들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86의 권력 독점을 순순히 눈감아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86 당사자인 김종민 민주당 의원은 지난 23일 86 용퇴론을 띄웠다가 사흘 만에 “사람이 아닌 제도의 용퇴를 뜻한 것”이라며 스스로 말을 삼켰다. "적대, 반목을 부추기는 정치 구조 퇴출에 86 정치인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86의 역할론을 주장하면서다.
장경태(39) 의원은 “86은 이제 그런 주인공 의식을 버려야 한다”며 "그런 시대적 소임은 후배들에게 양보하면 된다”고 직격했다. 정치 개혁을 86의 독점적 과제로 보는 것 역시 오만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게 장 의원의 인식이다.
장 의원은 86 정치인의 용퇴 방식에 대해 “개인적 결단이 필요한 문제”라고 했다. “86세대는 고도 성장기의 과실을 이미 많이 누렸다. 86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각오와 희생은 인정한다. 그러나 민주화는 그들만의 힘으로 이뤄낸 게 아니다. 함께 이룬 국민들에게 이제라도 보답해야 한다."
장 의원은 '50대 정치인에 유리한 공천 구조 손질'을 장기 과제로 제안했다. 그는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50대에게 공천의 63%를 몰아줬다”면서 “한 세대가 이렇게 똘똘 뭉쳐 다른 세대의 진출을 가로막으면 대한민국 정치 발전은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라고 했다.
장철민(39) 의원은 '86 용퇴론'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공감받는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86이 상징하는 진보의 내용과 틀이 시대적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이 이유"이라고 진단했다.
“86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다는 큰 방향성을 앞세운 진보였다. 새 시대엔 새로운 진보가 필요하다. 시장을 이해하고 개인 자유를 중시하는 시장주의적 실용 진보 말이다."
86 정치인들에 대한 장 의원의 평가는 냉정했다. “유능함을 보여주지 못했고 대의명분과 구호만 있었다”면서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탈원전 정책 등을 "이념만 앞선 디테일 부족의 사례"로 꼽았다. 86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통일 지향'에 대해서도 “북한을 보는 젊은 세대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놓치고 있다”고 했다.
장 의원은 "86용퇴론이 앞으로 진보 재편성 논의를 촉발할 것”이라며 “대선이 끝나면 진보 진영 내 노선 투쟁이 본격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학 최고위원은 민주당에서 '86 용퇴'를 가장 큰 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그는 21대 국회의 남은 임기 2년 동안 정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86의 마지막 임무"라고 했다. “86 선배들이 ‘제도의 용퇴’ 얘기를 꺼냈는데, 시간만 흘려 보내지 말고 당장 구체적인 계획서를 써서 국민 앞에 제출해 달라”면서 “계획을 이행하지 못하면 다음 총선에서는 집에 가셔야 한다”고 했다.
이 최고위원은 이번 대선이 사상 최악의 비호감 선거가 된 책임의 상당 부분을 86이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보수에 일부 내주더라도 선거 제도를 개혁하자’고 요구했다. 그 무렵 국회의원이 된 86 선배들은 '노무현 정신'을 외친 것 외에 무엇을 했는가. 소선거구제로 1등이 독식하는 구조를 여야가 번갈아 가며 이용해 왔던 것 아닌가."
다만 이 최고위원은 86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엔 경계한다고 했다. 그는 “민주당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나를 비롯한 청년 정치인들 역시 나서서 막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며 “그런 공동의 책임이 모여서 정권 심판론을 키운 것"이라고 반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