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만 좇는 선거의 끝이 궁금하다면

입력
2022.01.27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우크라이나의 한 고등학교. 교사 바실 페트로비치 홀로보로도코가 목소리를 높인다. “정치인들이 관심 갖는 건 자신들의 부(富)를 어떻게 늘리냐는 것뿐이야! 지긋지긋해. 내가 일주일만 대통령이 된다면 특혜와 특권을 모두 없애버리겠어.”

학생이 몰래 촬영한 이 모습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평범한 삶을 살던 홀로보로도코는 하루아침에 인기 스타가 된다. 이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 당선된 뒤 부패 정치인을 단죄하며 전례 없는 정치 개혁을 이뤄낸다. 2015년 우크라이나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국민의 종(Servant of the People)’ 줄거리다.

주인공을 열연한 사람은 코미디언이자 국민배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4년 뒤인 2019년 4월, 드라마는 현실이 됐다. 뒤늦게 정치판에 뛰어든 젤렌스키는 72.3%의 높은 지지율을 얻어 대통령궁에 입성했다. 러시아 침공 우려로 전운이 감도는 우크라이나의 현 대통령 당선 스토리다.

당시 세계는 화들짝 놀랐다. 낭만적 가상 정치가 비루한 현실 정치를 집어삼켜서만은 아니다. 젤렌스키는 대선 과정 내내 실현 가능성 높은 공약을 내놓지 못한 채 인기몰이에 급급했다. “취업자를 늘리겠다” “내전을 종식시키겠다” 는 장밋빛 청사진만 내밀었을 뿐, 어떻게 달성하겠느냐는 물음에는 입을 닫았다.

인터뷰나 상대 후보와의 토론 등 공식 무대에 오르는 것도 꺼렸다. 대신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지지자들만 결집시키는데 그쳤다. 요직에 앉힐 후보들을 팔로워들에게 추천받기까지 했다. ‘이미지 메이킹’에도 열을 올렸다. 드라마 속 스타일과 발언을 차용하며 자신을 ‘홀로보로도코’에 투영했다.

현지 언론들은 텅 빈 공약을 남발하고 민주주의 꽃인 선거를 우스갯거리로 전락시킨 젤렌스키에게 비판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부패한 기성 정치권에 염증을 느껴온 유권자들은 드라마 이미지를 현실로 끌어낸 그에게 환호했다.

‘먼 나라’ 이야기일까. 묘한 기시감이 든다. 20대 대선 주요 후보들이 그리는 대한민국의 미래 구상에도 ‘왜’와 ‘어떻게’가 빠져 있다. 기본 소득 지급, 광역 교통망 구축 등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요한 공약을 쏟아내면서도 누구도 ‘뒷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가치는 사라지고 모(毛)퓰리즘 같은 매표성 공약과 말초적 밈만 남았다.

전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은 특정 지지층 표심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되레 혐오와 편 가르기마저 부추긴다. 이 자리에 국정 철학은 물론,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안길 연금 개혁, 결혼과 출산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불평등과 집값 대책에 대한 고민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다시 우크라이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젤렌스키는 당선 후 국민의 기대를 충족했을까. 아쉽게도 현실은 드라마처럼 ‘해피엔딩’이 아니다. 선거 1년 뒤(2020년 3월)에는 지지율이 46%로, 작년 10월에는 24.7%까지 주저앉았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응답자 67.5%가 재선 도전을 반대했다. 지키지 못한 공약과 무능이 불러온 불안이 이유다.

미국 싱크탱크 우드로윌슨센터는 젤렌스키의 지지율 하락을 꼬집으며 이렇게 일갈했다. “대통령이 의회의 지지를 잃는 것은 악재다. 그러나 국민의 신뢰를 잃는 것은 ‘완전한 실패’를 의미한다.” 인기만 좇는 선거의 끝엔 회생하기 어려운 불신만 남는다는 얘기다. 선거를 40여 일 앞둔 우리 대선 후보들 역시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허경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