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대통령ㆍ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 표라도 많이 득표한 후보자가 당선자로 확정된다. 이른바 승자독식이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대통령제와 양당제라는 정치체제의 골격이 마련됐다. 미국과 비슷한 이런 정치 시스템은 효율적 정책 추진과 책임 정치에 합당하다. 하지만 과도한 집권 경쟁으로 국민적 갈등을 부채질하고 정치보복의 악순환에 빠지는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다. 현재의 승자독식 구도는 다양한 사회ㆍ경제적 요구를 포용할 수도 없다.
한국일보가 대선을 앞두고 핵심 정책과제 및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한 '대한민국 지속가능 솔루션’ 프로젝트 정치분과 세 번째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정치 양극화 해소와 연합정치 선거문화 유도를 위해 선거제도를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분과위원장을 맡은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전 한국정당학회장)는 "향후 대선에서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총선에서는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선에 결선투표를 도입하면 연합정치가 활성화해 적대적 정치풍토 또한 개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또 △위성정당 출현 방지 △높은 교섭단체 문턱 완화 △국고보조금 지급방식 개편 등을 제안했다.
지난 5일 화상으로 진행된 회의에는 정치분과위원장인 조진만 교수와 이재묵 교수, 장승진 국민대ㆍ박경미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정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참석했다.
조진만 교수=선거제도가 정당체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세부적으로 논의할 부분이 많다. 먼저 준연동비례대표제(준연동제)를 다루겠다. 21대 총선에서 도입됐지만 여전히 논란은 분분하다.
장승진 교수=준연동제가 국회의원 선거의 비례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위성정당이라는 편법이 동원되면서 사실상 제도 취지가 사라졌다. 위성정당 같은 편법을 예방할 장치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가 초점인데, 결국 의원 정수 확대를 통한 비례대표 의석수 확대가 불가피하다. 지역구를 줄이거나 의원 정수를 확대하는 방안 모두 현실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현실성과 상관없이 준연동제 도입이라는 선거제도 개혁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재묵 교수=지금은 기본적으로 비례의석이 너무 적다. 300석 가운데 50석도 채 안 된다. 준연동제를 도입하면서 53석에서 47석으로 도리어 줄었다.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국회의원이 움직여야 하는데 자기 지역구를 희생하며 비례의석을 늘리진 않을 것이므로 결국 의석수 확대 외엔 대안이 안 보인다. 문제는 국민 반감이다. 국회에 대한 신뢰가 낮은 상태에서 국민을 설득할 담론을 찾아야 한다. 헌법에 의석 수를 200석 이상으로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300석 이상으로 확대하는 절차가 개헌 사항인지 공직선거법 개정 사항인지에 대한 합의점도 찾아야 한다.
박경미 교수=준연동제 도입 취지가 비례성 강화였는데, 비례성을 높이는 이유는 유권자의 사표심리를 줄여 유권자의 표심을 의회정치에 보다 강하게 반영하기 위함이다. 비례대표를 보다 확대하기 위해서는 총 의석수를 늘리거나 총 의석수를 유지한 채 지역구를 줄이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조진만 교수=21대 총선 이후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준연동제가 너무 복잡하다고 불만을 표시했고, 폐지 또는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80%를 넘었다. 그런데도 거대 양당에서 별 불만이 없어 그런지 제도 개혁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장승진 교수= 어찌 보면 준연동제 도입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2004년 총선 때는 헌재 위헌판결에 따라 혼합형 선거제로 바뀌었다면, 지난 총선에서는 외부 요인이 없었는데도 정당 간 합의를 통해 선거제를 개선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준연동형이든 이전의 병립형 또는 완전 연동형이든 제도가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적은 비례대표 의석과 그나마 위성정당을 통해 취지를 훼손시키는 정치권 행태가 문제다.
이재묵 교수=비례대표에 대한 국민이나 국회의원의 차별적 인식도 극복해야 할 문제다. 2004년 이전 비례대표는 돈으로 산다는 의미에서 돈 전(錢) 자를 붙여 '전국구'라고 부를 정도로 부정적이고 차별적 인식이 많았다. 국회의원들도 비례의원들이 갖지 못한 지역구 선거 경험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관례적으로 초선을 하고 물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아니면 개인 능력으로 지역구를 받아 나가는 정도였다. 지역구 하다가 비례대표로 갈아타고 싶다는 인식이 형성될 정도가 돼야 비례의석을 늘릴 수 있을지 않을까.
장승진 교수= 비례대표를 폄하하는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공천과정의 불투명성이 아닌가 싶다. 지역구는 형식적이나마 대부분 경선을 치르는 과정이 있는데 비례대표는 그런 과정 없이 정당 내부에서 명부가 만들어진다. 만약 비례대표 의석을 확대한다는 대전제가 합의된다면 공천문제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이재묵 교수= 지금처럼 폐쇄형이 아니라 개방형 명부로 간다면 일반 당원과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좀 더 반영해서 비례의원 정당성이 배가되지 않을까 싶다.
조진만 교수= 정당에서 어느 직능을 뽑을 것인가 20개 정도 후보군을 제시한 뒤 당원들이 순위를 결정하고, 각 직능군에 후보자 신청을 받는 방식은 어떤가. 당원들이 각 직능군의 후보자를 보고 선택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비례대표라도 정당성이 생기지 않겠나. 청년, 노인, 여성 등 몇 개 직능군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 볼 수도 있다.
조진만 교수= 21대 총선에서 준연동제를 도입하면서 이전보다 비례성이 높아졌고 군소정당의 의석 확보에 조금 유리해졌다. 하지만 양대 정당이 위성정당으로 반칙하면서 취지가 실종되고 말았다.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박경미 교수= 현행 제도에서 위성정당을 만들지 못하게 법적으로 제재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당 설립의 자유도 무시할 수 없다. 준연동제 형태에서 별도 의석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한 자체가 문제다. 비례와 지역구를 연동시키면 위성정당을 만들기 어려워진다. 비례의석을 받으려면 지역구 의석이 있어야 한다든지, 일정 지역구에 후보자를 내야 한다든지 하는 단서 조항을 만들 수 있다. 비례의석을 할당하는 단서 조항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재묵 교수= 단서 조항을 넣으면 유령공천 등의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국가혁명배당금당이 지난 총선에서 여성 후보를 대거 공천하고 선거지원금을 싹쓸이했던 경우도 있었다.
장승진 교수= 정당 설립의 자유를 감안하면 위성정당 설립 자체를 금지시킬 수는 없다. 다만 모(母)정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못하도록 유도할 수는 있다. 지난번 모정당이 비례공천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성정당을 만들었던 점에 비춰보면, 모정당의 비례공천을 의무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일정 숫자 이상의 지역구를 공천한 정당은 비례대표 명부 제출을 의무화하는 건 가능하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양대 정당을 타깃으로 반드시 비례대표를 공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조진만 교수= 국고보조금 배분과 연계할 수도 있다.
박경미 교수= 선거보조금을 포함한 국고보조금은 총액의 50%를 교섭단체 정당에 우선 지급한다. 교섭단체는 이를 의석수 상관없이 똑같이 나눠 가진 뒤 5~20석 정당에 총액의 5%, 5석 미만 정당에 2%를 지급한다. 그러고도 남는 보조금의 절반은 의석수 비율로, 나머지 절반은 총선 득표율에 따라 지급한다. 이런 방식으로 양대 정당이 국고보조금의 대부분을 가져가고 군소정당은 소외된다. 비례성 확보를 위해서는 국고보조금 배분 방식을 교섭단체가 아닌 의석 비율 방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으며 관련 정치자금법과 국회법 조항도 동시에 개정해야 한다.
장승진 교수= 정당 설립 조건을 너무 까다롭게 한 정당법도 문제다. 5개 이상 시도에 시도당을 두고 각 1,000명 이상 당원을 요구하는 조건은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
박경미 교수= 군소 제3정당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라도 정치자금법상의 국조보조금 제도를 고쳐야 한다. 현재 경상보조금의 경우 의석수 비율로 지급하다 보니 소수 정당은 정치적 생존 자체가 어렵다. ‘생존을 위한 기본경상비+1/n’의 방향으로 고쳐야 한다.
이재묵 교수= 국고보조금을 포함한 의회 활동이 모두 원내 교섭단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원내 교섭단체 기준이 20석인데 300석 중에서 결코 낮은 비중이 아니다. 원내 교섭단체 진입장벽을 낮추는 논의가 필요하다.
조진만 교수= 국회에서 교섭단체가 꼭 필요한지가 의문이다. 원내 교섭을 교섭단체가 아니라 국회 스스로 하는 방안이나, 양당이 아닌 제3당 다선의원이 운영위원장을 맡는 다양한 실험이 필요하다.
조진만 교수= 대선 투표에서도 승자독식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선거 제도로서 결선투표도 거론되고 있다.
장승진 교수= 행정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총선이나 지방선거는 어렵겠지만 대선은 고려할 만하다. 당장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가능성이 거론되는데, 단일화는 사실 유권자를 배제시킨 후보들의 정치게임이다. 선거 때마다 후보 단일화가 거론되는 상황에서 유권자 의사 반영을 제도화시키는 게 결선투표라고 본다. 만일 지금보다 규모 있는 제3, 제4정당이 등장하면 매번 대선에서 30~40%의 지지율로 대통령이 당선되는데, 이런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결선투표를 도입하면 대통령제와 다당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이재묵 교수= 결선투표에서는 몇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보름 간격으로 결선투표를 진행하는데, 이러한 결선투표제(2회 투표제)는 비단 선거관리 비용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용이 크다는 비판 요소도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즉석 결선투표제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영국 런던시장 선거가 대표적인데 (프랑스처럼 두 차례 선거를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 차례 선거를 통해 1순위와 2순위를 한번에 마크해 즉석 결선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또한 순차적 결선투표라도 2라운드 진출 후보를 몇 명으로 정할지 등 디테일도 다양한 선택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도 의원선거에서는 12.5%까지 결선에 진출시킨다.
조진만 교수= 결선투표제를 하면 1라운드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려는 양대 정당은 군소정당과 어떻게 연합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고 평소에도 연합ㆍ타협의 정치가 활성화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재묵 교수= 역대 대선에서 투표율은 70% 안팎, 당선자 득표율은 35~40%를 기록하고 있는데, 결국 최종 득표율은 유권자 대비 30% 정도밖에 안 된다. 70% 유권자가 자신이 찍지 않은 당선자를 보며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구조다. 만약,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2순위라도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될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당성은 지금보다는 제고될 수 있다.
장승진 교수= 해외 사례는 프랑스가 가장 유명하지만, 의외로 대통령제 국가 중에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나라가 많다. 중남미 국가는 대부분이고, 미국도 일부 주에서 상원의원이나 주지사 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면 결선투표를 한다. 지난번 조지아주에서 결선투표를 했다. 국민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냐는 선호투표제도 분명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의 하나지만 직관적으로는 유권자에게 잘 와닿지 않는다. 과반 후보가 없으면 상위 2명의 후보가 결선투표를 한다는 것이 더 직관적이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발표한 개헌안에도 결선투표제가 포함됐는데 한국 유권자에게 어찌 보면 익숙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선거비용이 늘어나지만 그 정도 비용은 감당 가능하지 않나 싶다.
조진만 교수= 비용이 들더라도 하루에 하는 건 반대 입장이다. 1라운드에서 기준이 되는 후보를 추린 뒤 2라운드에서 또 한번 선택하도록 한다면, 유권자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는 셈이다. 다수 국가가 비용에도 불구하고 동시 선거를 안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