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그리고 영빈관 이전

입력
2022.01.28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청와대 영빈관 터는 조선시대 경농재(慶農齋)가 있던 자리다. 농업국가 조선의 임금은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그해의 풍흉을 점쳤다. 세종은 경복궁 후원에, 성종은 창경궁에 친경전(親耕田)을 뒀다. 고종도 경복궁을 중건하며 이곳에 경농재를 세우고 그 앞에 8구역으로 나뉜 친경전을 만들었다. 이 논밭은 ‘팔도배미’로 더 많이 불렸다. 배미란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논의 한 구역을 일컫는다.

□ 이곳에 영빈관 건물을 세운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1970년대 청와대를 찾는 국빈들이 늘며 만찬과 연회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다. 2000년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팔도배미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의 소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그러나 함경, 평안도 소나무를 위한 자리는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 청와대 영빈관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옮기겠다고 해 논란이다. 한 유튜브채널 촬영기사가 "아는 도사가 총장님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영빈관부터 옮겨야 된다고 하더라"고 하자 김씨는 "응, 옮길 거야"라고 맞장구쳤다. 이어 윤 후보는 아예 "대통령실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설치하고, 대통령 관저는 삼청동 총리공관 등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청와대를 통째로 옮기거나 해체하겠다는 심산이다. 선거가 한참 남은 시점에 대선후보 부인이 국가 시설을 제 맘대로 옮기겠다고 한 것 자체가 황당하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떠오른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 전체를 이전하는 것도 이미 문재인 대통령이 '광화문 1번지' 시대를 열겠다고 공약했다가 영빈관과 경호 등 문제로 포기했던 사안이다.

□ 사실 현 영빈관의 문제는 터가 아니라 기능에 있다. 연회장만 있고 숙소는 없어 정상 외교의 장으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실제로 미국 대통령은 방한 시 하얏트호텔, 중국 국가주석은 신라호텔에 묵는다. 반면 미국 영빈관 블레어하우스엔 방이 119개나 된다.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이 면적은 43만㎡에 달한다. 청와대를 이전하는 것도 합리적 이유가 먼저 제시된 뒤 국민 공감대 속에 진행돼야 하는 사안이다. 도사의 말이나 역대 대통령의 말로가 근거가 될 순 없다. 지금은 21세기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