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만 해냈다” 서울 1.5배 땅을 녹색 바다로

입력
2022.01.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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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팡칼란분 나무 농장을 가다

편집자주

인도네시아 정부 공인 첫 자카르타 특파원과 함께 하는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ㆍ다양성 속 통일)'의 생생한 현장.

사방이 녹색이다. 눈동자는 초록으로 물든다. 바람에 고요하게 흔들리는 능선과 등성이는 풀빛 파도다. 낮게 드리운 구름이 솜털 이불처럼 스르르 바다를 덮는다. 해발 475m 전망대는 망망대해의 나룻배다. 수평선(水平線)이 아닌 수평선(樹平線)이 아득한 녹색 바다, 나무의 바다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비행기로 1시간 20분, 다시 차로 1시간 30분 북쪽을 향해 날고 달려야 마주할 수 있는 광활한 풍경이다. 칼리만탄(보르네오)섬의 중부칼리만탄주(州) 팡칼란분 나무 농장이다. 조림 면적만 6만3,000ha에 달한다. 한국의 수도 서울 전체(6만500ha)가 빠짐없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고 머릿속에 그려 보면 가늠할 수 있다. 허가 면적은 서울의 1.5배(9만4,384ha)다. 인도네시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나무 농장이다.

농장을 거미줄처럼 잇는 폭 6~18m의 임도(林道) 길이는 무려 3,700㎞다. 서울과 부산을 대략 다섯 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수확 때 나무 길이는 20~25m, 줄기 높이 1~1.5m인 벼 농사에 빗대면 키 28~34m의 거인에게나 적합한 농사다. 직접 보기 전에는 비현실적인 숫자들의 향연에 취해 상상조차 누추했음을 현장에서 실감했다. 이 놀라운 역사는 한국인이 이뤄냈다. 20년 넘게 차근차근.

적도에 뿌리내린 K-임업

팡칼란분 나무 농장은 1998년부터 조성됐다. 인도네시아 대표 한상(韓商) 기업 코린도그룹은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43년의 조림 허가를 받은 뒤 현지 법인(KTH)을 설립했다. 1993년 허가 받은 동부칼리만탄주 발릭파판 인근 나무 농장(1만6,000ha)을 잇는 도전이었다. 한국 산림청에 따르면 발릭파판은 한국인이 해외에 조성한 두 번째 나무 농장, 팡칼란분은 한국인이 일군 가장 넓은 해외 조림지다.

처음엔 안팎의 반대가 심했다. 장기간 거액을 투자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나무 농사를, 그것도 불확실성이라는 지뢰가 도처에 깔린 해외에서 시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천연목을 베어 내던 임업에서 벗어나 숲을 가꾸고 관리하는 지속 가능한 조림이 미래 가치라는 합의가 전진의 원동력이었다. 열대림 보호와 지구 온난화 감소 기여가 푯대였다.

직원들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오지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해충이 들끓고 야생 동물이 숙소로 침입하는 나날을 견뎠다. 은퇴한 한국의 임업 전문가들도 직접 현장에 머물며 전문 지식과 애정을 심었다. 박종명 KTH 법인장은 "중부칼리만탄주에만 조림 허가를 받은 업체가 22곳에 이르지만 실제 조림을 시도하고 성공한 기업은 코린도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적도의 땅에 한국인들만 조림다운 조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KTH는 한국인 20여 명을 비롯해 4,5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연간 생산량은 100만㎥다. 대표 수종은 호주가 원산지인 유칼립투스 펠리타다. 나무껍질(수피)이 두꺼워 산불이 나도 생존력이 강하다. 3개월 키운 길이 25㎝ 묘목을 심으면 6년 뒤 수확 시기엔 높이 20~25m, 사람 가슴 높이에서 잰 지름(흉고직경)이 18~20㎝까지 자란다. 6개 구역으로 나눠 매년 한 구역씩, 여의도 35배 넓이에서 수확하고 다시 심는다.

양묘장 두 곳에서는 품종 개량이 한창이다. 현재 농장에 심은 유칼립투스 펠리타 클론(복제)은 생물 연료(바이오매스)용인 아이디(ID) 30, 가구 등을 만드는 용재(用材)용 ID 63 두 개뿐이지만 올해부터 하나씩 추가해 2030년 10개 정도로 늘릴 예정이다. 병해충 피해를 줄여 생산성을 높이고 건강한 생태를 조성하려는 연구 개발은 21년째 이어지고 있다. 농장이 보유한 클론은 200개다. 하나의 클론을 얻으려면 보통 10년, 안정적으로 15~18년이 걸린다. 같은 클론을 각기 다른 토질 등에서 심고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농장 곳곳에 시험림을 두는 이유다.

양묘장이 생산하는 묘목은 연간 1,500만 본이다. 잎이 달린 줄기를 7~8㎝ 길이로 잘라서 2주간 밝은 온실에 두고 뿌리내리게(삽수)한다. 뿌리가 나오면 2개월 정도 키워 출하한다. 그런데 묘목이 노랗고 붉은 게 영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정윤화(41) 양묘 담당 과장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도록 출하 전 물도 적게 주는 등 악조건에 적응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라며 "파릇파릇한 묘목은 오히려 좋은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농장에서 남쪽으로 50㎞ 떨어진 나타이(natai) 목재가공단지에는 종이나 섬유 원료로 쓰이는 펄프용 나무 칩들이 아파트 9층(25m) 높이로 쌓여 있었다. 7.3메가와트(MW) 용량의 바이오매스 발전소도 있다. 정세용 공장장은 "100% 목재팰릿으로만 발전해 한국 기준 2만3,000가구가 쓸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며 "남는 전기는 인도네시아전력공사(PLN)에 팔고 일부는 지역 주민에게 무상 공급한다"고 했다.

다시 남쪽으로 직선거리 25㎞ 지점의 코린도 합판공장(KABS)에서는 직원 1,200명이 3교대로 일본 등으로 수출할 콘크리트 거푸집용 합판을 생산하고 있었다. 김지한 KABS 부장은 "농장에서 수확한 나무로 7㎜ 마루판을 개발해 수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산불 내던 주민들도 나무 심기 동참

팡칼란분 나무 농장은 주민의 삶도 바꿨다. 입에 풀칠하려고 화전을 일구거나 숲을 파헤쳐 사냥하던 주민들은 이제 나무를 심고 가꾼다. 주민림 사업 덕이다. 코린도는 주민이 소유한 땅에 나무를 심게 해 주면 톤당 7달러(약 8,300원), 주민이 직접 가꾸기까지 하면 톤당 35달러(약 4만2,000원)를 준다. 2006년 시작한 주민림은 현재 5,100ha로 늘었고, 주민들은 총 76만 달러(9억여 원)를 벌어들였다.

토팔란 마을의 시마스(60)씨가 말했다. "예전에는 대부분 주민이 산에 불을 질러서 밭을 만들었어요. 산불금지법이 시행되면서 새로운 밭을 일굴 수 없었죠. 나무를 심은 뒤부터 생활이 안정돼 더 심고 있어요. 지인들에게도 권하고 있죠. 우리의 미래니까요." 누르 후다(47)씨는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돈 걱정이 사라져 나무를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고 웃었다.

주민 수익 사업은 더 있다. 2020년부터 곤약 원료인 포랑(porang)과 향수 '샤넬 넘버5'의 원료인 닐람(nilam)을 시험 재배하고 있다. 친환경 쓰레기 처리에 부가 수익까지 안기는 동애등에(Black Soldier Fly·BSF) 구더기 농장도 운영하고 있다.

세계 최대 오랑우탄 보호구역을 찾아서

팡칼란분 나무 농장은 오랑우탄 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 오랑우탄보호단체와 협력해 개체수를 조사하고 보호구역을 연결하는 생태 통로를 잇고 있다. 농장에서 직선으로 93㎞ 남쪽에 위치한 탄중 푸팅(Tanjung Puting) 국립공원은 세계 최대 오랑우탄 보호구역이다. 41만5,040ha로 자카르타 넓이의 약 6배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1997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2014년) 등의 방문으로 더 유명해졌다.

공원 매표소에서 스피드보트로 맹그로브를 감상하며 30여 분 깊숙이 들어가자 탄중 하라판(Tanjung Harapan) 캠프에 닿았다. 마침 오랑우탄에게 먹이를 주러 가는 공원지킴이(ranger)들을 따라갔다. 밀림을 10분 정도 걸었더니 나무가 들썩이는 소리와 함께 암컷 산드라(28)가 나타났다. "어우~" 하고 부르자 수컷 팔도(24)와 서열 2위 에르윈(35) 등 오랑우탄 10여 명이 야외 식당에 차려진 과일을 먹었다. 인도네시아어로 '숲(utan 또는 hutan)에 사는 사람(orang)'을 뜻하는 만큼 공원에선 '몇 마리'가 아닌 '몇 명'으로 센다.

공원지킴이 아부(43)씨는 "이름이 있는 오랑우탄은 33명, 아기까지 포함하면 40여 명이 부근에 살고 있다"며 "영양 조절을 위해 매일 30㎏씩 음식을 주고 있다"고 했다. 지척에서 오랑우탄 10여 명과 1시간 넘게 눈을 맞췄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 오랑우탄의 선한 눈동자에 깃들길 소망한다.

팡칼란분·탄중푸팅(칼리만탄)= 고찬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