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만나고 호감이 있는 관계를 가리켜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이 말은 심적 거리뿐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도 포괄한다. 심적으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다가갈 수 있는 물리적 거리도 가깝기 때문이다. 서로 친밀한 사이라면 얼굴을 맞대는 것도 자연스럽고 반갑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가까이 다가온다면 불편하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건물과 시설 역시 사람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것들 간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으며, 이것이 지켜질 때 안전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고 시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갈수록 경제성과 효율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원칙들이 훼손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사는 도시 공간에서의 적절한 거리는 무엇이며, 왜 지켜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인간과 문화적 공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근접학(Proxemics)을 정립한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미국 동부의 성인들을 관찰하며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4개 차원으로 분류했다. 1.5피트(약 50㎝) 이내는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로 분류되는데, 연인이나 가족이 서로 위로해주고 보호해주는 행위가 일어나는 거리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서로의 체온이나 체취를 느낄 수 있고 피부와 근육을 통해서도 의사소통이 이뤄진다.
조금 떨어지지만 쉽게 손이 닿는 거리인 1.5 내지 4피트(약 50㎝~1.2m)는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로 분류된다. 친한 친구나 지인들과의 대화가 이뤄지는 거리이며 다소 배타적인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을 형성한다.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는 4~12피트(약 1.2~3.5m) 정도인데, 더 이상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다. 직장 동료 간에 일상적인 업무가 이뤄지는 거리며, 사교 모임에서도 흔히 관찰되는 거리다. 팬데믹 상황에서 자주 거론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 범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적 거리(Public distance)는 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반경을 완전히 벗어난 거리다. 공적인 인물의 강연이나 공연 시에 관찰되며,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일반 대중 간의 거리가 좋은 예다. 대중은 특별한 허락 없이는 이 거리보다 가깝게 접근하기 어렵다.
이처럼 관계나 상황에 따라 사람 간의 적정 거리가 다르며, 이는 도시공간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부여한다. 공원의 벤치나 대중교통의 좌석 배치가 좋은 예다. 공원의 벤치는 통상 일정 간격을 두고 설치하고,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탈 수밖에 없는 버스나 열차의 좌석은 대부분 한 방향으로 설치한다. 개인적 공간을 확보하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적정 거리는 사람뿐 아니라 도시의 건물과 도로, 시설들 간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주택들이 너무 가까이 있으면 통풍에 문제가 생기고 사생활이나 일조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건축법에서는 대지 경계선에서 일정 거리를 띄워 주택을 짓게 하고, 남쪽 주택의 고층부는 들여 짓게 해서 북쪽 집의 일조권을 보호한다.
반대로 건물들이 너무 떨어져 있어 발생되는 문제도 있다. 토지를 낭비할 뿐 아니라 상권 형성과 같은 집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인접해 있는 여러 가게들을 들러 다양한 상품을 비교해보고 맘에 드는 물건을 사고 싶어한다. 그러고 나서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가로수길이나 복합쇼핑몰의 인기가 높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바다코끼리나 하마와 같은 접촉성 동물이 있고 말이나 새 같은 비접촉성 동물이 있듯이, 도시의 건물과 시설도 마찬가지다. 상업이나 업무용 건물은 가까이 모여 있을 때 훨씬 더 활성화되고, 거주하는 공간인 주택은 일정 거리를 유지할 때 더 안정감을 준다.
동물이나 사람들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오해나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나듯이 도시공간도 마찬가지다. 공동주택의 경우, 마주보고 있는 동(棟)은 일정거리를 띄우도록 법으로 강제하고 있다. 사생활 보호와 저층 세대의 일조권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한의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처음 이 규정이 만들어진 1970년대는 각 동의 높이만큼 띄어서 지어야 했다. 그런데 더 많은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이 규정은 지속적으로 완화됐으며, 현재는 높이의 반만큼(0.5배)만 띄우면 된다. 더구나 도시형생활주택은 높이의 4분의 1만 띄우면 두 동을 나란히 지을 수 있다.
이렇게 적정 거리를 무시한 도시개발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2015년 일어난 의정부 화재사건을 돌아보자. 한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가 옆 건물로 옮겨 붙어 5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을 당한 이 두 개의 건물은 모두 도시형생활주택이었다. 만약 이 두 건물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지어졌더라면 어땠을까. 분명 불이 옮겨붙은 옆 건물은 화재를 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첫 번째 건물의 화재 진압도 신속히 이뤄져 안타까운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시생활에 필요한 주요 시설에도 적절한 거리가 있다. 초등학교는 400~500m 이내, 어린이공원은 250m가 이용 반경이다. 소위 생활 기반시설은 절대적인 규모도 중요하지만 주거지와 어떠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인구 대비 시설의 수나 규모가 충분하다 하더라도 골고루 분포하지 않고 특정 지역에 몰려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토지리정보원의 분석결과를 보면 초등학교까지의 평균거리는 가장 양호한 서울이 1.19㎞로 적정거리 한계의 두 배가 넘고, 가장 먼 강원도는 무려 5.58㎞로 열 배 이상이다. 어린이공원을 포함한 생활권 공원 접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울은 1㎞로 법적 기준의 네 배에 이르고, 두 번째로 가까운 부산도 2㎞로 여덟 배에 달한다. 병·의원이나 도서관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적절한 거리 내에 있지 않으니 걸어서 이용하지 못하고 불가피한 자동차 통행이 발생하니 그만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너나 없이 주택공급 확대를 외치며 용적률 상향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전하고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면 주거지 용적률 500%가 가진 위험성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도시공간에서의 적정 거리(Appropriate distance)에 대해 냉정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고층아파트를 빽빽하게 짓는다면 주택난은 해소될 수 있겠지만 그 안의 많은 가구들은 햇볕을 보지 못하고, 사생활은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건강함이 결여된 이런 도시가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적절한 거리두기를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