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19일(현지시간) 동이 트지 않은 새벽.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州) 주요범죄수사국 소속 수사관들이 애들레이드시 웨스트테라스 묘역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묘 하나를 파헤치고 있었다. 작은 굴착기로 돌 무더기와 단단한 표토를 제거하고 삽으로 두터운 흙을 걷어내자 73년간 땅 속에 묻혀 있던 유해가 드러났다. 경찰들은 작은 솔로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낸 뒤 유해를 새로 짠 나무 관에 조심스럽게 옮겨 담았다. 작업은 시작한 지 12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새 관 위에 달린 명판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1948년 12월 1일. 무명인(unknown) 서머튼맨’. 호주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제 사건이자, 사인(死因)도 연고도 알아내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이곳에 누워 있던 남성의 정체를 밝히는 첫걸음이었다.
경찰이 깊은 잠을 깨운 남성은 누굴까. 1948년 12월 1일 오전 6시 40분. 애들레이드 서남쪽 서머튼 해변 백사장에서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낮은 방조제에 머리를 기대고 모래 위에 평온한 얼굴로 누운 그는, 언뜻 보면 마치 길에서 잠든 듯 보였다. 당초 경찰은 지병이 있던 사람이 해안가를 산책하던 중 급사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신원 파악 역시 어렵지 않을 것으로 봤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은 데다 인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국계 외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할수록 경찰은 미궁에 빠졌다. 당장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정장 속 주머니에서는 지갑이나 신분증 등 존재를 증명할 만한 물품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옷의 라벨마저 모두 뜯겨져 나간 상태였다. 치과 기록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얼굴 사진과 지문을 찍어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 영국계 민족이 거주하는 모든 국가의 수사당국에 신분조회를 요청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그를 아는 사람도, 찾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사람처럼.
‘단서’를 찾기 위해 실시한 부검 결과는 혼란을 더했다. 비장 크기는 일반인보다 세 배나 컸고, 위와 간에 피가 몰려 있었다. 장기 곳곳에선 울혈이 발견됐다. 지병이 아니라 독살에 의한 심장마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부검의는 그가 독극물 때문에 숨졌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체내에는 독극물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삿바늘 흔적이나 독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생리학적 반응 흔적도 없었다. 수사는 제자리걸음만 맴돌았고, 그는 1949년 6월에야 조촐한 장례식과 함께 영면에 들었다. 숨진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흔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시신 발견 한 달 뒤 인근 철도역 보관소에서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서류 가방이 발견됐다. 실마리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가방 속 소지품은 의문을 해소하긴커녕 더욱 증폭시켰다. 옷가지는 사망 당시 입고 있던 옷처럼 라벨이 모두 제거돼 있었다. 바지 주머니 깊은 곳에서 나온 찢어진 쪽지 내용은 더욱 괴이했다. ‘타맘 슈드(Tamam Shud)’. 12세기 페르시아 유명 시인이자 천문학자 오마르 하이얌의 책 루바이야트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이다. 페르시아어로 ‘끝났다’는 의미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책의 행방을 제보해 달라고 호소했다. 얼마 뒤, 한 남성이 경찰을 찾았다. “최근 차 뒷좌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책이 버려져 있었고, 마지막 장이 뜯겨져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찢겨진 자국은 숨진 남성의 바지 주머니에서 나온 종이와 일치했다.
책은 꽉 막혀 있던 사건의 유일한 단서였다. 맨 뒷장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다섯 줄의 영어 알파벳 대문자가 뒤죽박죽 적혀 있었다. 호주 최고 암호해독 전문가가 모인 해군 정보부를 비롯,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달라붙었지만 70여 년간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다. 그 밑에는 숫자도 적혀 있었다. 조사 결과 이는 27세 간호사이자 한 살배기 남자 아이 ‘로빈’의 엄마, 제시카 톰슨의 전화번호였다. 그는 수사 과정에서 줄곧 “숨진 남성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고 왜 내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며,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톰슨이 살던 집은 시신이 발견된 서머튼 해변에서 겨우 400m 떨어져 있었다. 경찰이 그에게 숨진 남성의 얼굴을 석고로 본뜬 안면상(데스마스크)을 보여주자 소스라치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는 수사 기록도 남아있다. 경찰은 수년간 톰슨을 의심했지만 연관성도, 결정적 증거도 찾지 못했다. 톰슨은 이후 “평판에 해가 된다”며 경찰 사건 파일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 달라고 요구했다. 2007년 숨질 때까지 경찰 수사는 물론, 언론의 취재 요청에도 협조하지 않았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한 남성의 죽음은 단박에 대중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쓸모’를 다한 스파이가 공권력에 암살당했다는 설(設)부터 독살당한 암거래상이라거나 치정관계에 있던 톰슨으로부터 살해당했다는 소문까지 수십 년간 각종 음모론이 잇따랐다. 특히 서방 국가와 소련 간 냉전이 극에 달했던 당시 시대상은 ‘스파이 설’에 무게를 실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알파벳 문자는 비밀 코드이고, ‘끝났다’는 메시지는 남성에 대한 경고라는 그럴듯한 해석도 쏟아졌다. 사건 발생 직전 호주 정부가 소련과 내통한 첩자들을 대거 검거했던 사실도 음모론에 힘을 보탰다.
수십 년 뒤에는 아예 톰슨의 딸이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남성이 소련의 스파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어머니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공산주의자였고, 숨진 남성에 대해 ‘경찰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 종종 언급했다곤 했다”고 밝혔다. 다만 모든 것은 추정일 뿐, 지금까지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톰슨의 아들 로빈이 숨진 남성과 부자(父子) 관계였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름 없는 남성의 귓구멍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더 컸는데, 이는 백인 가운데 1~2%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부검 과정에서 확인된 치아발육부전증(정상 치아보다 치아의 수가 적은 상태) 역시 전체 인구의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특성이 함께 나타날 확률은 많아야 1만분의 1 수준. 놀랍게도 로빈에게선 두 가지 모습이 모두 확인됐다. 정부는 데드마스크에 남아 있을 남성의 유전자(DNA) 정보를 채취해 비교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기술 미흡 등의 이유로 실패했고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졌다.
70여 년이 지난 2019년, 진실을 알아낼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법무부가 숨진 남성의 DNA 채취를 위한 시신 발굴을 허용한 것. 2007년부터 사건을 다시 파헤쳐 온 데릭 애보트 애들레이드대 교수가 12년간 주 당국에 요청한 끝에 얻어낸 성과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발굴한 유해는 호주 법의학센터로 옮겨진 상태다. DNA 전문가와 인류학자, 병리학자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남자의 정체를 밝히고 있다. 호주 공영방송 ABC는 “DNA를 추출하고 연구하는 데 1년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정부와 연구팀은 이후 해당 정보를 로빈의 유족 등과 비교한다는 방침이다.
사람들은 당시보다 진일보한 과학 기술에 희망을 걸고 있다. 앤 콕슨 주정부 과학수사대 부국장은 “지금 우리의 DNA 분석 기술은 시신이 발견됐던 1940년대보다 몇 광년은 앞서간다”고 강조했다. 부검의를 혼란에 빠뜨렸던 사인 역시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성공을 낙관하긴 이르다. 수사 초기 경찰이 시신 부패 속도를 늦추기 위해 방부 처리를 하면서 DNA 손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탓이다. 린지 윌슨 와일드 과학수사대 국장은 “방부액 속 화학물질은 체내 단백질을 분해해 박테리아가 섭취할 수 있는 것이 남지 않도록 한다”며 “유전자 분석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관계자들은 시신 발굴과 연구를 선정적 흥밋거리로 봐선 안 된다고 당부한다. 그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주 경찰청 최고 범죄 수사관인 데 브레이 경감은 현장에 모인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이 사건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수수께끼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아들이며 할아버지, 삼촌, 형제일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일(시신 발굴)을 하고 그의 이름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