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는 아내가 관여했다면 총리도 국회의원도 사임하겠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7년 모리토모 의혹이 불거지자 당시 국회에서 한 말이다. 이 발언이 그대로 삽입된 일본 드라마 ‘신문기자’가 한국 드라마 일색이던 일본 넷플릭스 시청 순위에서 17일 1위에 올랐다. 지난 13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첫 방송된 후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서 시청자의 호평이 이어지며 순식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베 정권의 사학 특혜 및 공문서 조작 사건인 ‘모리토모 스캔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 드라마는 심은경 주연으로 2019년 만들어졌던 동명의 영화를 6부작 시리즈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일본 연예계에서 금기시돼 온 현실 정치 문제를 직접 다룬 진지한 내용인데도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뛰어나 “마치 한국 드라마처럼 몰입된다”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후지히 미치히토(35) 감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일본 영상업계도 자국만이 아닌 해외 관객이나 시청자까지 염두에 두고 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모리토모 학원 스캔들이란 사학재단 모리토모 학원이 초등학교 부지를 매입할 때 국유지를 감정가인 9억3400만 엔보다 8억 엔이나 싼 1억3400만 엔에, 그것도 국비로 사들였는데 이런 특혜에 아베 전 총리 혹은 부인 아키에 여사가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게다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재무성이 문서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고, 상부의 명을 받아 문서를 조작했던 공무원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일본 정부는 문서 조작에 총리관저의 개입은 없었고 재무성이 알아서 조작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드라마 ‘신문기자’는 정부와 회사 내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는 신문기자가 주인공이다. 픽션이므로 다소 사실 관계가 다른 점이 있고, 인물이나 회사 이름이 모두 실제와 다르지만 스캔들의 핵심 내용은 거의 사실에 부합한다.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에서 일본 시청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절대 지상파에서는 못 만들었을 작품이다” “해외 미디어인 넷플릭스이기 때문에 제작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TV 드라마에서 현실 정치 현안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일은 드물다. 물론 가상의 정치를 다룬 드라마는 종종 만들어지지만, 실제 정치 현안이나 유력 정치인 스캔들을 정면으로 다룬 드라마는 제작되기 어렵다.
2년 전 개봉된 영화 ‘신문기자’는 주연 배우를 맡을 사람을 찾지 못해 한국 배우인 심은경을 캐스팅했다. 반면 이번 드라마는 ‘닥터 X’ 등으로 인기가 높은 일본의 톱 배우인 요네쿠라 료코가 주연으로 나섰다. 요네쿠라는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국민으로서는 역시 거짓말이 없는 정치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듯 일본의 언론과 방송 등 미디어가 총리관저의 동향에 민감한 반면 해외 자본인 넷플릭스는 출연료 등 제작비도 충분히 지원하고 자국 내 지상파 방송이 다루기 껄끄러운 내용도 적극적으로 제작할 수 있어 드라마화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베 전 총리가 2019년 건강 문제로 사임해 정치권에서 아베의 영향이 줄어든 것도 드라마 제작이 가능했던 배경으로 추측된다.
젊고 역량 있는 영화감독을 투입해 지상파에서는 내보내지 못하는 장르의 미니시리즈를 만드는 것은 넷플릭스가 이미 한국에서 ‘ ‘오징어 게임’ ‘지옥’ 등을 만들어 낸 성공 공식이다. 이를 일본에서도 적용한 것이 ‘일본 드라마 같지 않은 일본 드라마’를 만든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후지이 감독은 ‘일본판 스튜디오 드래곤’을 목표로 하는 제작사 ‘바벨 레이블(BABEL LABEL)’에 소속돼 있으며, 한국 드라마처럼 일본 국내만이 아닌 해외를 겨냥한 작품을 만들려 한다고 최근 포브스 인터뷰에서 밝힌 적 있다. 평소 한국 드라마 리뷰어로 활동하는 한 일본인은 '신문기자'를 본 후 “일본 드라마에서도 희망을 보았다”는 트윗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