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서 기다린 '완주 생강'... 겨울에도 알싸한 맛 그대로

입력
2022.01.17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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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우리 고장 특산물 : 완주 생강
아열대작물 생강, 전북 완주서는 생강굴에 보관
최대산지 타이틀 넘겼지만 '시배지' 자존심 지속
편강 등 다양한 가공제품으로 美·日 시장도 개척


겨울철 시베리아 기단이 주춤한 사이 서쪽에서 공기가 이동해오면 추위가 누그러지지만 미세먼지가 문제다. 반면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올 땐 하늘이 청명하지만, 동장군이 기승을 부린다. 이래저래 한국인의 기관지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겨울, 칼칼한 목엔 따뜻한 생강차만 한 게 없다.

생강 시배지(처음으로 식물을 심어 가꾼 곳), 전북 완주군 봉동읍은 1,000년 이상 한국인의 기관지를 지켜온 곳이다. 생강은 생산은 물론 보관에도 상당한 공이 들어가는 아열대 작물이다.

기온이 영하 6도까지 내려간 지난 11일. 봉동읍에서 생강 농사를 짓는 전진홍(78)씨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본채 양쪽으로 출입문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하나를 밀고 들어가니 높이 1.8m의 좁고 깊은 토굴이 나온다. 매서운 바깥 바람이 잠시 비켜간 듯,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굴 안쪽에는 지난가을 수확한 생강이 자루에 가득 담겨 있었다. 전씨는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용하고 있는 토굴"이라며 "완주에서만 볼 수 있는 이 굴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생강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강 보관 '토굴 800개' 전북 완주

김치를 담글 때 없어선 안 될 필수 양념이자, 면역력 증강 식품으로 각광받는 생강은 본래 첫 서리가 내리는 10월 상강(霜降) 전까지 수확을 끝내야 한다. 하지만 수요는 겨울에 늘어나는 탓에 완주 사람들은 토굴을 만들어 생강을 얼지 않게 보관한다. 온돌식과 수평식, 수직강하식 등 다양한 형태의 생강굴이 완주엔 813개 있다. 대규모 저장을 위한 현대식 저온창고의 등장과 재배면적 감소로 지금은 279개만 유지되고 있지만 완주 생강굴은 2019년 '국가중요농업유산(제13호)'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보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온돌식은 일반 가옥 구들장 밑으로 토굴을 만들고, 아궁이 열로 온도를 유지하는 가장 보편화된 방식이다. 경사지나 구릉지를 1.5~1.8m 정도 수평으로 파고 만든 수평식, 땅속을 6~10m 깊이로 파서 만든 수직강하식은 최대 10톤까지 보관이 가능하다. 형태는 달라도 생강굴에선 보관 최적 온도로 13~15도가 유지된다. 수확 후 수요가 늘어나는 겨울까지 품질을 유지한 봉동 생강이 으뜸으로 평가받아온 이유다.

만경강 봉실산 품은 천혜의 완주 봉동

완주 생강 생산의 중심인 봉동은 해발 373m의 봉실산과 멍에방천이라 불리는 제방을 끼고 있는 전북의 젖줄 만경강 사이에 있다. 이민철 완주생강전통농업시스템보존위원장은 “생강 농사는 물 빠짐이 좋아야 한다”며 “봉동 일대는 사질토가 분포해 예로부터 최고 품질의 생강 재배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고려시대부터 봉동이 명성을 이어온 배경에는 천예의 자연조건도 한몫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고부가가치

생강은 울퉁불퉁한 모양과 알싸한 맛 때문에 상품화를 위해선 가공이 필수적이다. 1994년 봉상생강조합을 설립해 부가가치가 큰 가공제품 생산에 앞장서 온 임희문 조합장은 "생강의 소비 특성상 주로 겨울에 공급이 집중돼 그 외 계절에는 공장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에 편강을 시작으로 생강 농축액, 다진생강 등으로 가공품 범위를 넓혔다"고 말했다. 초절임 생강과 세척 생강을 미국과 일본에 수출해 해외시장까지 개척했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잠시 주춤한 상황이다.

임 조합장이 이끌고 있는 조합은 한때 28개의 전통식 저장굴에 생강을 보관했다. 하지만 가공 제품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대형 생강 보관 저장고가 필요했다. 대용량 저장고로 활용됐던 수직하강식 생강굴에서는 종종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목숨을 잃는 사고도 발생했다. 임 조합장은 이에 2001년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생강 보관에 최적화한 저온창고를 개발했다. 조합은 현재 500톤까지 보관할 수 있는 저장고를 가동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재배면적이 536ha에 이를 정도로, 완주는 국내 최대 생강 생산지였다. 하지만 2020년 기준으로 72ha까지 재배면적이 줄어들면서, 충남 서산과 경북 안동 등에 최대 생산지 타이틀을 내줬다. 하지만 서산 생강도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완주와 불가분의 관계다. 완주생강전통농업시스템 보존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김선태 박사는 "1930년대 봉동 주민 6세대가 충남 서산으로 이주해 생강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을 계기로 완주군은 생강 시배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김춘만 완주군 먹거리정책과장은 “봉동은 국내 자생생강 최초 시배지로 한때 전국 생강의 60%를 생산하던 지역이었다”며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향후 토종생강 조성지의 보존과 관리 방안을 마련하는 등 생강 시배지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완주= 김성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