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위를 보며 살게 만드는...도시의 마법

입력
2022.01.15 04:30
13면
<8> 도쿄의 동네들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10여 년 전 겨울, 나는 사진기자와 함께 뽀얀 입김을 뿜으며 경복궁 옆 서촌 골목을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 등 20~30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서울의 트렌디한 공간들을 취재하는 중이었다. 사진기자의 손에는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가, 내 손에는 A4 용지에 출력한 지도 조각을 여러 장 이어 붙인 커다란 종이가 들려 있었다. 사나흘에 걸쳐 취재할 20여 개의 공간들을 빨간 점으로 손수 표기한 지도였다(스마트폰의 실시간 길 안내가 불안정했던 시절이었다). 매달 서울의 한 동네를 콕 짚어 그곳의 볼거리와 먹거리를 소개하는 것이 당시 내가 일했던 잡지의 주된 업무였는데, 어느 동네에 가든 취재 마지막 날이면 테이프로 이어 붙인 지도의 접지 부분이 찢어질 듯 나달거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날도 사진기자와 나는 빠듯한 일정 탓에 식사도 거른 채, 미리 섭외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들어서는 순간 원두 볶는 냄새가 진동하는 로스터리 카페, 만화 '심야식당'을 연상케 하는 아늑한 선술집, 주인의 감각이 돋보이는 빈티지숍, 예술 관련 서적들이 보기 좋게 진열된 독립서점...... 몇 집 건너 한 집꼴로 퐁당퐁당 나타나는 힙한 가게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 동네에 사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일본 드라마 '도쿄여자도감'의 주인공 아야도 그 시절 나와 비슷한 처지다. 아키타현 시골 마을 출신인 아야는 장래희망을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다소 속물적인 여자 아이.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을 꿈꾸며 도쿄로 상경한 그녀는 유명 연예인들이 산다는 롯폰기힐스의 고층빌딩을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셀러브리티들의 통조림 같네”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나 대도시에 사는 사회초년생이 그렇듯, 이제 막 취업한 아야에게 자신이 원하는 동네에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런 그녀가 잡지에 나오는 키치죠지나 시모키타와 같은 패셔너블한 동네 대신 타협안으로 선택하는 곳이 바로 도쿄 서쪽 세타가야구에 위치한 산겐자야다. 줄여서 ‘산챠’라 불리는, 도시 중심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시골 정취를 풍기는 이 조용한 주택가 마을은 아야의 말에 따르면 “레트로한 분위기의 오래된 가게들 사이로 이제 막 새로운 가게들이 생기고 있는 동네”이자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적당히 세련된, 지금의 나와 딱 맞는 동네”이다. 저녁이면 골목에 밥 익는 냄새가 풍기고,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술집이 있고, 두세 마리의 개를 끌고 산책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곳. 외국인 거주 비율이 높은 롯폰기가 서울의 이태원이라면 산챠는 그 옆 해방촌쯤 될까?

롯폰기힐스를 동경하고 키치죠지에 살고 싶어하는 20대 초반 여성의 첫 독립을 지켜보며 나는 서울의 멋진 동네들을 이방인의 눈으로 동경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나아가 당시 내가 만난 서울의 수많은 산겐자야들을 떠올렸다. 서울 골목골목을 인구 조사원처럼 돌아다니던 시절, 이태원과 홍대 앞은 고사하고 해방촌과 연남동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나는 젊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동네에서 멋진 공간을 운영하는 내 또래의 힙한 친구들이 늘 부럽고 궁금했다. “이 동네를 고른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라는 내 질문에 해방촌에서 대안공간을 운영하는 젊은 미술 작가는 “주변에 재밌는 친구들이 많고, 위치도 강남과 강북 중간이고, 무엇보다 월세가 싸잖아요?”라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연남동 토박이로 집 근처에 가게를 오픈했다는 20대 타투이스트는 “늦게까지 사람들과 놀고도 택시를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요”라며 쿨하게 웃었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그들만의 산겐자야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이런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 그들만의 산겐자야를 만들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특정 동네를 며칠씩 돌아다니며 가게 주인이며 주민 등을 연달아 인터뷰하다 보면 그 동네 특유의 개성이랄지 분위기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피부에 와 닿곤 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비슷해 보였던 동네가 실은 강북과 강남만큼 다르다는 걸 깨달을 때도 있었다. 이태원과 해방촌, 홍대 앞과 연남동의 미세한 차이를 체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어 경리단길 빌라에 임시 거주 중이라는 독일 작가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다. “경리단길은 이태원보다 예쁘지만 한남동보다는 못생겼죠. 그러고 보면 서울은 작은 도시들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 같아요.”

'도쿄여자도감'의 도쿄 역시 작은 도시들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다. 서울 못지않게 지역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동네 간의 빈부 차도 심하다. 부촌과 빈촌의 격차가 심하다는 건 주거비용의 편차가 크고,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승 욕구도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아야가 직업적 성공을 거둘수록, 그리고 교제하는 남자의 경제적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녀가 사는 동네가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 좌석으로 옮겨 타듯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는 이유다. 그래서 11화로 구성된 각각의 드라마 회차에는 산겐자야, 에비스, 긴자, 도요쓰, 요요기우에하라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다. 돈 많은 남자를 잡아서라도 부촌에 입성하길 꿈꾸는 아야의 열망은 낯뜨거울 정도로 속물적이지만 한편 그 열망의 온도가 짐작 가는 것도 사실이다. 사는 동네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은근히 얕잡아보는 문화는 우리에게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취재 과정에서 동네에 대한 기묘한 열등감 혹은 뒤틀린 자부심 탓에 예상 밖의 푸대접을 받는 일이 자주 있었다. 명동에서 10년째 장사 중이라는 중년의 카페 사장은 “다 망해가는 동네, 뭐 볼 게 있다고 촬영까지 오슈?”라며 나와 사진기자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끔거렸고(내가 나중에 돈이라도 요구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성북동에서 고급 와인 바를 운영하는 슈트 차림의 오너는 “우리는 부르고뉴 와인만 전문으로 팔아요. 단골들 입이 워낙 까다로워야지. 그나저나 성북동 공부 좀 하고 오셨나?”라며 양반이 백정 보듯 우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도쿄여자도감'의 아야도 동네 때문에 이런저런 수모를 겪는다. 아야의 직장 동료는 “샨챠에 살고 있다”는 그녀의 말에 자기도 같은 동네에 산다며 반가워하면서도 “내가 사는 곳은 미슈쿠이긴 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단다. 같은 동네라도 자신의 집이 중심부와 더 가깝다는 걸 은근슬쩍 강조한 것이다. 이후 에비스로 이사한 아야는 명품 브랜드 면접 자리에서 사는 동네를 묻는 질문에 에비스라고 답했다가 면접관으로부터 “에비스는 젊은 여자들의 동네죠”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듣는다.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는 30대 여자가 20대 애송이들이 노는 번화가에 사는 건 좀 미스매치라는 뜻이다. 한때 화려한 도시 여자의 이미지였던 에비스가 20대에 졸업해야 할 거리가 되었음을 깨달은 아야는 일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도시이자 “진짜 일류 도시 여자들이 모이는 곳”, 긴자로 이사를 감행한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도시의 커리어우먼이 된 기쁨도 잠시, 아야는 리볼빙으로 명품을 쇼핑하며 카드빚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긴자에서 고급 기모노 가게를 운영하는 유부남과 연애하며 초호화 생활을 맛보는 동안 눈이 한없이 높아진 탓이다. 아야는 도쿄에 사는 여자를 ‘다양한 아이템을 모아야 하는 롤플레잉 게임의 주인공’에 비유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고급 기모노 가게를 운영하는 남자는 그녀가 만나는 수많은 ‘썸남’ 중 가장 난도 높은 아이템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그저 돈 많은 졸부가 아닌, 어려서부터 고급문화를 향유해온 ‘내추럴 본’ 도련님으로서 긴자라는 동네의 보수성과 콧대 높은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아야가 아무리 ‘구찌’에서 일하고 ‘마놀로 블라닉’을 신는다 해도, 어려서부터 긴자의 전통 있는 상점을 드나들고 가부키 전용 극장에서 고급 도시락을 먹으며 성장한 포목점 도련님을 이길 수는 없다. 타고난 로열패밀리, 요즘 말로 ‘넘사벽’ 귀족의 등장이다.


아야와의 첫 데이트에서 “그런 신발은 내가 창피해”라며 그녀에게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선물하는 긴자의 귀족을 보며 나는 소공동에서 앤티크 소품을 파는 노부인을 인터뷰했던 것을 떠올렸다. “소공동이요? 요즘 친구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역사와 유산이 있는 동네죠. 아, 우리 가구는 아무나 만지면 안 되는데...”라며 그녀가 촬영 중인 사진기자에게 새하얀 면장갑을 내밀었던 것도. 청담동에 젊은이들 취향의 디저트 가게를 연 셰프가 여기만큼 텃세가 심한 곳은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던 일도 기억난다. “맞은편 옷가게 사장님이랑 인사 트는 데 6개월이나 걸렸다니까요.”

긴자의 귀족과 헤어진 후 아야는 결혼과 별거, 이혼과 재혼을 거치며 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인생의 시기들을 빠짐없이 경험한다. 그렇게 도쿄라는 나라의 다양한 아이템을 섭렵하며 마흔 살이 된 그녀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되묻는다. ‘너, 행복하니?’

아야와 마찬가지로 마흔이 된 나는 오래전 내가 부러워했던 동네에 살고 있다. 젊은 여성들이 살고 싶어하는, 패션 잡지에도 종종 등장하는 예쁜 동네. 그러나 명품을 두르고 있는 누군가에게 말하면 “아, 젊은 애들 많이 가는 그 동네요?”라고 답할 동네에. '도쿄여자도감'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야가 롯폰기힐스의 고층 빌딩이 예전과 달리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처럼, 나 역시 우리 동네의 아름다움이 한때 좋아했지만 싫증난 옷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저층 주거지구의 아름다움과 맞바꾼 생활의 불편함에 문득 짜증이 올라오기도 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동네로 이사 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가 통장 잔고를 보고 한숨 쉬는 일도 다반사다. 그럴 때면 아야의 속물 같은 면이 내게도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항상 위를 보며 살게 만드는 도시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강보라(소설가ㆍ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