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정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있을까 종종 생각한다. 책의 경우가 특히 어렵다. 책의 내용과 정서를 정확히 포착하면서도 독자의 눈길을 끌고, 지나치게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뚜렷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제목을 고민하다 보면,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닿은 뒤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래도 끝까지 버리고 싶지 않은 제목의 조건이 있다면, 검색에 유리하게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검색했을 때 뒤로 밀리는 단어나 문장이어서는 안된다. 제목이 '사랑'이라거나 '인생'이라면 세상에 가득한 인생 이야기와 사랑 이야기에 밀려버릴 수밖에 없다.
쿠팡플레이에서 시청 가능한 영국 BBC 드라마 시리즈 '라이프'의 제목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영어권에서는 이 드라마 검색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역시 그랬다.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 콘텐츠를 모아둔 데이터베이스 검색만으로도 제목에 '라이프'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이 200개 이상 나온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라이프'라는 제목의 의학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다. 생과 사를 다루는 작품일 때 제목을 '(그게 바로) 인생'이라고 짓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지만, 모든 콘텐츠 정보를 검색으로 찾는 이 시대에 검색이 어렵다는 것은 작품에 관한 호기심을 그다음 단계로 이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과도 같다.
그런 의미에서 쉬운 검색을 위해 영국 드라마 '라이프'의 연관 검색어, 참고가 될 만한 정보를 먼저 전달하려고 한다. '라이프'는 같은 방송사에서 2015년에 처음 방송된 후 시즌2까지 이어진 드라마 '닥터 포스터'의 스핀오프 드라마다. 이 드라마 제목이 익숙하다면, 2020년 봄의 화제작 '부부의 세계' 때문일 확률이 높다. '부부의 세계'는 '닥터 포스터'의 리메이크 작품이다. '부부의 세계' 속 인물로 대입하자면,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주인공 지선우의 친구인 고예림(박선영)에 해당하는 인물인 애나 스톤(빅토리아 해밀톤)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라이프'다. 애나는 남편과 이혼을 한 후 맨체스터로 이주해 벨 스톤이라는 결혼 전 이름으로 살고 있다. 가식과 거짓말, 불륜과 폭로가 난무하던 세계를 빠져나온 이 여자는, 새로 도착한 곳에서 이전에 가진 적 없는 행복과 평화를 찾아냈을까?
그런 건 없다는 선언으로, '라이프'는 시작된다. 벨은 총 네 가구가 거주하는 2층 맨션의 1층 귀퉁이에 홀로 산다. 옆집에는 출산을 앞둔 한 여자와 그의 약혼자가 살고 있다. 맨션 소유주인 은퇴한 의사와 전업주부인 그의 아내가 위층을 쓰고,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가 옥탑 구조의 공간에서 지낸다. 이 맨션에서 깨어나고 잠드는 모든 인물에게 숨겨진 사연과 사정을 조금씩 풀어나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 부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이야기의 자장을 펼쳐나가는 원작과는 달리, 그로부터 가지를 뻗어낸 이 이야기는 한 건물의 각기 다른 집에 사는 네 명의 인물에게 각자의 인생을 전개할 기회를 준다. 이들은 심지어 그리 친밀하지조차 않다. 오직 공동현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이 얽히게 될 뿐이다.
주인공이 없는 드라마. '라이프'를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형식적으로도, 내용으로도, 은유적으로도 그렇다. '닥터 포스터'에서는 조연이었던 벨의 인생을 통해 생각해보자. 벨이 가족과 연락을 끊고 이름까지 바꾸며 결혼한 이유는 심각한 우울증과 경계성 인격장애가 있는 동생을 돌보는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는 것,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일의 의미는 새로운 출발이 아닌 이미 알고 있는 지옥으로의 귀환이다. 이혼이 불러온 심각한 알코올 중독은 여전히 벨을 시험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또다시 실감하는 중이다.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자신을 얕잡아보는 남편 옆에서 평생 마음을 졸여온 게일(앨리슨 스테드먼)은 어떤가? 우연히 만난 학창 시절 친구가 이야기해주기 전까지, 게일은 남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인식조차 못 하는 상태였다. '라이프'는 제목에 걸맞게 인생에 닥치는 느닷없는 사건을 맨션에 던진 후, 인물들이 무엇을 잊고, 잃고, 모른 채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충격요법을 쓴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인가? 도대체 무엇이 '나의' 인생인가?
'라이프'는 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라는 격언을 던지는 대신, 뜻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벌어지는 인생에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킨다. 내 인생에 사정이 있다면, 타인의 인생에도 사정이 있다. 그 누구도 혼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다. 맨션은 이를 보여주기 위한 무대벨은 데이비드(아드리안 레스터)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걸 모르는 상태로 그에게 맨션 공동비용을 독촉한다. 데이비드는 대답한다. "사정이 있었어요." 벨은 우스운 말하지 말라는 듯이 쏘아붙인다. "우리 모두 사정이 있죠."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의 사정 앞에서 벨처럼 행동한다. 내 인생은 복잡하고 쉽게 이해받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타인의 인생은 겉으로만 본다. '라이프'의 주인공은 개인이 아니라 이들이 가진 사정, 이들의 인생에 들이닥친 사건이다. 자신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었던 한 여자의 착각을 산산조각 내면서 시작한 '닥터 포스터'가 그랬듯이, '라이프' 속의 인물 모두에게는 남모르는, 때로는 나조차 알지 못했던 사정이 있다. 이 부분에서 '닥터 포스터'와 '라이프'의 세계관은 겹쳐진다.
인물들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사연이 대체로 불륜과 중독, 폭력 언저리의 일이라는 점에 집중한다면, 이 작품을 '닥터 포스터'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라이프'는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어떻게 인생의 다른 길로 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라이프'의 인물들은 사람과 감정이 변할 수 있고, 내 인생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 선택한다. 이 선택 때문에 '라이프'의 인물들은 '닥터 포스터'와 같은 세계에 살면서도 반대 방향으로 간다. 현실을 인정하고 나면 파멸과 파국, 복수로부터 방향을 틀 수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이성애 로맨스와 결혼 생활을 인생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라이프'의 인물들을 응원하게 되는 건, 이들이 방향을 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나 타인의 인생을 망칠 게 예상되는 선택을 피하고, 실패하더라도 노력해보기로 한 사람들만 살고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속 맨션은 판타지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판타지는 모든 인물의 막연하고, 고통스럽고, 낭비되었던 인생과 그 인생을 살아온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엉망진창인 구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이, 각자의 사정을 감당하면서 하는 선택이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만든다. 그래서 해나(멜리사 존스)가 결혼을 주저하고 있음을 알게 된 맨션의 모든 여성이 힘을 합쳐 파혼을 돕는 엔딩은 당연히 해피엔딩이다. 이혼, 별거, 이별로 무너지는 세상에 살아봤던 여자들이, 더 젊은 여성이 향하던 길에 마련된 파국을 예상하고 방향을 틀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해나는 게일과 벨이 갔었고, 이미 되돌아온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라이프'는 '닥터 포스터'보다 덜 자극적이지만 더 진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물들이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확장될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다. 마당이 있는 교외의 멋진 주택가에서 맨션 단지로 이동했을 뿐, 두 작품의 인생관은 여전히 성애 관계를 둘러싼 비밀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머물러 있다. 모두가 독점적 로맨틱 파트너와 연결되어야만 안심하는 세계의 풍경은 이 정도면 충분히 본 것 같다. 그래서 벨이 진짜 인생을 사는 유일한 인물이 자신의 조카 마야(에린 켈리먼)임을 깨닫는 장면이 중요하다. 정신병을 딸인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엄마 밑에서 자란 십대 레즈비언 마야는, 이 세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끊임없이 실망시키는 어른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마야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 전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야의 인생은 '라이프'의 스핀오프가 될 수 없으며,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다시 쓰여야 한다. 2022년과 어울리는 이야기는 마야의 이야기가 아닐까? '라이프'보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목 검색은 더 잘 될 것이며 이미 어디선가 본 이야기인 듯한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검색은 그 세대가 가장 많이 하는 일 중 하나이고, 새로운 이야기란 그런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