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직업이 특정 성(性)의 전유물로 인식되는 경향은 점점 옅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사는 남성, 간호사는 여성'이 구시대의 도식이 된 것처럼요.
성역할 고정관념은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유독 특정 성의 결합이 끈끈한 직업군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스포츠 중에선 '야구'가 그렇습니다. 4대 구기종목(야구, 축구, 배구, 농구) 중 여성 리그가 없는 유일한 종목이죠.
그런데 최근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는 여성들이 잇따라 등장했습니다. ①호주프로야구(ABL) 역사상 첫 여성 선수인 제네비브 비컴(17)이 그 첫 번째 주인공입니다. 그는 멜버른 에이시스와 2022-2023 시즌 육성 선수 계약을 맺습니다.
비컴은 8일 멜버른 챌린지 시리즈 애들레이드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는데요. 그가 몸을 푸는 모습만으로도 관중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죠. 초반엔 긴장한 듯했지만 결국 1이닝 동안 무안타 무실점으로 첫 경기를 무사히 마칩니다. 이날 던진 가장 빠른 볼은 시속 135㎞를 기록했죠.
②두 번째 주인공은 레이철 볼코벡(35). 그는 미국프로야구 사상 첫 여성 감독이 됩니다. 현지매체들이 10일 메이저리그(MLB) 뉴욕 양키스 구단 산하 마이너리그 싱글 A팀인 탬파 타폰즈의 감독으로 볼코벡을 선임할 예정이라고 보도했죠.
그밖에도 ③류현진의 소속 팀 토론토 블루 제이스 산하 마이너리그 구단 타격 코치에 제이미 비에이라가, ④휴스턴 아스트로스 선수 육성 디렉터에 사라 구드럼이 임명됐죠. 모두 해가 바뀌자마자 쏟아진 소식들입니다.
사실 여자야구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됐습니다. 여성의 권리 신장 운동과 함께 약 150년 전부터 시작됐죠. 미국 여자야구의 역사를 다룬 책 '경기장의 여성들: 야구하는 여성 이야기(Women at Play: The Story of Women in Baseball'(1993년))에 따르면 1866년 결성된 '바사' 여학교 야구팀이 여자야구의 시초입니다.
당시 여학교들은 평등권 투쟁의 결과물로 설립됐는데요. 소속 야구팀이 유니폼까지 갖춰 입으면서 당시 여성이 누리지 못했던 경기에 참가할 자유, 자유롭게 입을 자유를 누리는 '파격'을 선보였죠.
'프로'라 할 만한 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0년대입니다. 미 전역에 '블루머 걸즈'(Bloomer girls)라는 팀이 창단되면서였죠. 이들은 각 지역의 아마추어, 세미프로, 마이너리그 소속팀과 경기했는데요. 1890~1920년 사이 100여 개의 블루머 걸즈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블루머 걸즈라는 이름은 팀원들이 경기 때마다 블루머라는 바지를 입으면서 붙여졌습니다. 블루머는 통이 넓은(루즈핏의) 터키식 바지인데요. 여권 운동가 아멜리아 블루머가 고안했습니다.
사실 블루머 걸즈는 혼성팀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팀원 중 여성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걸즈'라고 불렸죠. 블루머 걸즈는 안타깝게도 1930년대 대공황과 함께 사라집니다. 동시에 여성들에겐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쉬운' 소프트볼이 권장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943년 여자프로야구 리그(AAGPBL)가 운영되기도 했는데요. AAGPBL은 남자선수들이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되면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자아실현보다는 엔터테인먼트 목적이 앞섰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AAGPBL엔 12년 동안 600여 명의 여성이 참가했는데요. 안타깝게도 1954년 9월을 마지막으로 리그가 종료됩니다. 톰 행크스, 지나 데이비스, 마돈나가 출연한 영화 '그들만의 리그'(1992년)가 AAGPBL을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블루머 걸즈와 AAGPBL을 합치면 미국 여자프로야구 리그는 여자야구 150년 역사의 3분의 1 동안만 존재한 셈입니다. 여자리그의 부재로 많은 여성 야구인들은 남성리그에서 뜁니다.
마이너리그팀과 처음 계약한(1889년) 선수인 리지 애링턴, 시범경기이긴 했지만 1922년 메이저리그 팀과 경기한 최초의 여성인 리지 머피, 흑인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히 뛴(1953~1954년), 사실상 '첫 여성 프로선수' 토니 스톤, 흑인리그 사상 첫 여성 투수 매미 존슨이 있었습니다.
1952년 MLB가 '여자 선수와 계약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만들면서 여성 프로야구 선수의 맥이 끊기는데요. 40년 후인 1992년 이를 삭제하면서 1998년 프로 리그(독립 리그)에서 처음 우승한 일라 보더스, 2014년 청소년 리그에서 완봉승을 거둔 모네 데이비스가 탄생합니다.
여성 코치의 시대는 2009년 뒤늦게 열리지만 훨씬 번성합니다. 독립 리그 브록턴 락스의 1루 코치로 임명된 저스틴 시걸이 포문을 열었죠. 2019년은 이른바 '여성 코치의 물결'이 불었던 해입니다. 볼코벡이 당시 첫 정규직 타격 코치로 선임됐고요. 첫 여성 근력 및 컨디셔닝 코치(미네소타 트윈스) 안드레아 헤이든도 이때 임명됩니다.
구단을 운영하는 프론터에서도 '유리 천장'이 조금씩 깨지고 있습니다. 1990년 보스턴 레드삭스 부단장으로 임명된 일레인 웨딩턴 스튜어드를 필두로요. 2020년엔 아시아계 미국인인 김응이 최초의 여성 단장(마이애미 말린스)에 오릅니다.
가까운 일본에도 남성 프로리그에 진출한 여성 선수 에리 요시다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여자프로야구리그는 1950~1952년 잠깐 존재하다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요시다는 2008년 독립 리그 코베 크루즈9 신인 드래프트 7순위(전체 27번)로 지명돼,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여성 선수가 됩니다. 최고구속은 101㎞에 불과하나 너클볼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강점을 보였죠. 2010년부터 3년 동안 미국 독립 리그에서도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여성 프로야구 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벽을 뛰어넘으려 도전했고, 지금도 도전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선수들이 있습니다.
선두주자는 안향미(41)입니다. 안향미는 199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 등판, 공식 대회에 출전한 첫 번째 여성 선수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가 2020년 개봉한 '야구소녀'입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남동생을 따라 야구를 시작했는데요.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중학생 시절 남녀공학이면서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옮겼고, 고등학교 진학 땐 서울시교육청 특기자자격까지 고쳐 가며 입학합니다. 말 그대로 여자야구의 개척자였죠. 먼저 야구를 시작한 남동생은 1년 만에 야구를 그만뒀다고 합니다.
안향미의 야구인생은 고교 졸업을 앞두고 난관에 빠집니다. 선수로 받아 주겠다는 대학도, 프로야구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됐던 한국 프로야구 규약은 1996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남성 선수들과의 실력차, 특히 '힘'에서 현실의 벽을 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안향미는 선수가 아닌 학생으로 체육교육과에 진학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취미로 야구를 하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대한야구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야구선수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어요."
실제로 안향미는 입단테스트를 받았던 한화로부터 "선수 대신 프런트로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합니다. 이후 미국 여자야구팀 워터베리 다이아몬즈 입단 제의가 왔지만 통장 잔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자를 못받아 무산됐죠. 안향미는 2002년 일본으로 건너가 드림윙스라는 사회인야구팀에서 뛰는데요, 수입이 적은 탓에 마트, 레스토랑 일을 겸해야 했다고 합니다.
안향미는 한국으로 돌아와 2004년 국내 첫 여자 사회인 야구팀 '비밀리에'(BIMYLIE·Baseball Is My Life)를 결성, 23세 감독이 됩니다. 선수 생활은 접었지만 여자야구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또 다른 꿈을 위해 발돋움한 겁니다. 그러나 2011년 호주 버컴힐 팀에서 1년간 활동한 것을 마지막으로 야구를 접습니다.
안향미의 뒤를 이은 김라경(22)은 한국 리틀야구 최초의 여성 선수이자 대학리그 최초의 여성선수입니다. 대한민국 여자야구 국가대표팀 최연소 선수라는 기록도 갖고 있죠.
특히 야구'선수'로 살고 싶어서 서울대에 진학했다는 일화로 유명합니다. 서울대 야구팀만이 특기생이 아닌 일반 학생도 대학 리그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E채널 예능 '노는 언니'에 나와 재수 끝에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다시 화제가 됐죠.
박민서(18)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16년 구속이 이미 100㎞를 넘었고, 그해 한국 여자 초등학생 중 첫 홈런을 날린 선수가 됩니다. 2019년엔 아시아 선수 최초로 미국 여자야구대회 '내셔널걸스 베이스볼 토너먼트'에 초대돼 뉴욕 원더스 소속으로 뛰며 7타수 3안타 6사사구로 활약합니다. 앞서 소개드린 MLB 최초 여성 코치 저스틴 시걸이 박민서를 눈여겨보고 초대했습니다.
영화 '야구소녀'에서 주인공 주수인은 프로야구 2군 선수가 되며 프로의 꿈을 이룹니다. 일부는 "비현실적인 결말"이라고 비판했죠. 남성과 여성의 현격한 실력 차이는 '사실'이라며 "영화에 팩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능한 것만 꿈꿀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가수 이효리씨의 말을 빌어 되묻습니다. 시기와 방법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여성 프로야구 선수가 탄생하는 날이 올겁니다. 성(性) 때문에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낡은 현실'의 벽을 누군가는 계속 깨부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