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보소 이 길 좀 보소...

입력
2022.01.14 09:00
<56> 밀양아리랑길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우리나라 3대 아리랑으로 꼽히는 ‘밀양아리랑’의 한 소절이다. 흔히 아리랑을 두고 ‘한(恨)’의 정서가 서려 있다지만 밀양아리랑은 예외다. 빠르고 경쾌하니 한은커녕 ‘흥(興)’이 난다. 단순하고 투박할지언정 중독성 있는 운율과 가사로 배우기 쉽고 부르기 쉬운 건 두말하면 잔소리.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남 밀양에는 이 민요를 꼭 닮은 길이 있다. 걷기 쉽고, 걸을수록 흥이 나고, 흔한 동네 둘레길 같지만 중독성 있는. 그래서 이름도 밀양아리랑길이다.

풍류 담은 제3코스 금시당길

밀양아리랑길은 2013년 조성됐다. 밀양관아-삼문동-영남루로 이어지는 제1코스와 밀양향교-추화산성-충혼탑으로 이어지는 제2코스, 용두목-금시당-월연정-추화산성으로 이어지는 제3코스로 나눠진다.

1코스가 시가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밀양사람들이 가장 빠대던 길’이라면 2코스는 그윽한 묵향 나는 밀양향교를 시작으로 ‘조선시대와 삼국시대를 관통하는 역사의 길’, 3코스는 밀양강을 끼고 도는 옛 선비들의 멋과 기운을 만날 수 있는 ‘풍류의 길’이다. 이 가운데서도 금시당길로 유명한 제3코스를 지난 12일 찾았다.

3코스 출발점은 용두산 입구 용두목이다. 산세가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용이 승천하듯 웅장하고 험한 산길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건너편에서 보면 밀양강에 엎드려 물을 들이켜는 용머리를 닮았다. 덕분에 3코스는 평탄한 언덕길이 주를 이룬다. 바로 앞에는 비슬산과 운문산, 가지산 등줄기 물이 만나는 용두연이 있다. 먼 옛날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기우소로 쓰이던 곳이다. 70~80년대에는 뱃놀이와 은어요리를 즐기려는 연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였다.

아리랑길을 동행한 최해화 밀양시문화관광해설사는 “당시만 해도 낙동강 하구에서 회귀한 은어가 지천이라 은어 식당이 즐비했다”며 “용두목에 들어서면 은어가 풍기는 수박향에 취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아쉽지만 지금은 둑과 댐이 들어서면서 은어 물길도 막힌 상태다.

"어디를 봐도 좋다, 언제 봐도 좋다"

용두목에서 왼쪽으로 밀양강을 두고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동지섣달 한겨울인데 나무 사이로 드는 빛이 제법 따스하다. 빽빽할 밀(密), 볕 양(陽) 이름대로다.

대숲, 굿바위 등을 거쳐 40여 분을 걷다보면 금시당 백곡재를 만난다. 하나로 붙여 부르지만 금시당과 백곡재는 각각의 건물이다. 금시당은 조선시대 문신 이광진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에 돌아와 1566년에 지은 별장이다. ‘금시’는 ‘지금이 옳다’는 뜻으로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에서 따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5대손인 이지운이 1744년에 복원했다. 백곡재는 금시당을 재건한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1860년에 세운 재사(齋舍·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소나 사당 인근에 지은 집)다.

어찌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이런 명당이 없다. 배산임수. 동쪽으로는 호두산, 서쪽으로는 용두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앞쪽으로는 밀양강을 껴안았다. 금시당 대청에서 강변 쪽으로는 커다란 창을 내 창틀을 액자 삼아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경관을 걸어 놓았다. “십 년을 계획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 청풍 한 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여놓을 곳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 때마침 해설사가 읊조리는 송순의 시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사실 금시당이 가장 북적이는 때는 가을이다. 이광진 선생이 고택을 지을 때 심은 수령 450년의 은행나무 때문이다. 둘레는 성인 3명이 양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두껍고, 가지는 집 전체를 덮을 듯 풍성하다. 11월이면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잎이 사방을 황금빛으로 수놓는다.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대문 밖 한참 너머까지 줄이 늘어선다 하니 잘 심은 나무 하나 열 관광지 안 부럽다. 물론 굳이 가을이 아니라도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장관이다. 나뭇잎에 가려져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날것 그 자체, 나무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지금이 특히 그렇다. 다가올 봄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몸을 있는 대로 기울여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매화나무도 그래서 자세히 다시 보게 된다.


"다 버리고 낙향할 만하다"

금시당을 나와 국궁장을 지나면 월연정으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월연정은 조선 중종 때 함경도 도사를 지낸 월연 이태 선생이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1520년에 지은 정자다. 담양 소쇄원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정원으로 꼽힌다. 보름달이 뜰 때 달빛이 강물에 비쳐 기둥을 이루는 월주경이 백미다. 마루에 걸터앉으니 산수화 같은 단장천 강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괜스레 시라도 한 수 짓고 싶어진다. 당시 매월 월주가 서는 보름마다 이곳에서 시회가 열린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만한 낙원이 또 있으랴. 벼슬이고 뭐고 다 버릴 만하다.

월연정 초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하나 있다. 바로 금시당 은행나무 못지않게 ‘인생 샷’ 장소로 유명한 용평터널이다. 백송터널, 월연터널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 1월 1일 개통된 경부선 철도터널인데 1940년 복선화 사업으로 이설된 후 지금은 일반도로로 이용 중이다. 터널 가운데가 트인 독특한 건축 형태에 일정 간격으로 비치된 조명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 영화,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많다. 다만 좁은 폭 탓에 양방향 통행은 불가하기 때문에 진입 전 터널 입구에 설치된 신호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3코스 종착지인 추화산성은 월연정에서 1.2㎞를 더 오르면 닿는다. 제법 가파른 구간도 있지만 그리 길지 않다. 추화산성은 해발 243m 추화산 산마루에 돌로 쌓은 성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가야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태껏 걸은 길에 비해 산성은 다소 결이 다른 느낌이지만 여기서 시가지를 조망하는 것도 옛 선비들이 즐긴 풍류 못지않게 즐겁다.

용두목에서 추화산성까지는 총 5.6㎞, 3시간 정도 걸린다. 길이 끝날 때쯤 밀려오는 허기는 돼지국밥으로 달래도 좋다. 때마침 밀양시가 밀양돼지국밥 브랜드화를 위해 개발한 캐릭터 ‘굿바비’ 구경은 덤이다.

박일호 밀양시장은 “아리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밀양의 정신이고 자부심”이라며 “밀양아리랑길이 그에 걸맞은 대표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먹거리연계 등 다양한 콘텐츠를 보완·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밀양= 박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