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탕을 가득 채운 하얀 원. 이상욱(1923~1988)의 1973년 작 '점'은 달 혹은 달항아리처럼 보이는 커다란 원형으로 구성한 추상이다.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되돌려온 그의 작품 세계는 말년 '자기화'의 길을 갔다. 일필휘지로 휘갈긴 듯 서체적 충동을 분출한 1984년 작 '봄-B'는 분명 서양 추상화와는 다르다.
지난 6일부터 서울 종로구 학고재 갤러리가 여는 '에이도스를 찾아서: 한국 추상화가 7인'전은 서구 미술의 추상 계보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한국 추상회화의 다양한 얼굴들을 비춘다. 이상욱을 비롯해 이봉상·류경채·강용운·천병근·하인두·이남규의 작품 57점을 선보인다. 시기적으론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김환기·유영국·남관의 뒤를 잇는, 1920년대에 태어난 작고 작가 중심이다. 전후 서구로부터 유입된 추상회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단색화와는 또 다른 한국적 양식을 이룩해낸 이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복기 경기대 교수는 "(전 세계적 관심을 촉발한) 단색화 외에 세계 무대에 내놓을 한국 미술은 무엇이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우리 추상화에 흐르는 근원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존재사물의 본질을 뜻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 개념을 전시 제목으로 가져온 것처럼, 우리 추상의 뿌리를 찾으면서 동시에 단색화의 전후좌우를 살피는 일이다.
이봉상(1916~1970)과 류경채(1920~1995)를 통해선 구상에서 점차 반(半)추상과 추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도정을 닮았다. 13세였던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이봉상은 내내 구상 작업을 하다 1965년 이후 추상으로 나아갔다. 식물 열매의 절단면이나 세포를 연상케 하는 '미분화시대 이후 2'에서 보듯 원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류경채는 생전 명성이 대단했다. 자연으로의 회귀를 바탕으로 한 그의 작업은 1980년대 이후 기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으로 이어졌지만 서양과 달리 서정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강용운(1921~2006)과 천병근(1928~1987)은 우리 미술사에서 과소평가된 대표적 작가다. 구상이 우세했던 호남에서 추상미술을 개척한 강용운은 1950년대부터 일찌감치 전위미술에 심취했다. 장판지를 동원해 물감을 흩뿌리거나 불로 태우는 등 실험을 서슴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서정적 세계로 이행한 그는 1983년작 '무등의 맥'처럼 '구상 충동'이 엿보이는 추상을 남겼다.
천병근은 일본 유학 시기에 배운 초현실주의 조형 양식을 국내 화단에서 선보였다. 대담한 붓 터치만으로 조형성을 획득하는 추상으로 서체적 초현실주의를 이룩했다는 평이다.
하인두(1930~1989)와 이남규(1931~1993)는 각각 불교와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추상회화로 구현했다. 하인두는 불화, 단청, 민화, 무속화 등에서 영감을 얻어 한국 문화의 원형을 탐구했다. 대전 대흥동성당 등의 성모상과 유리화를 제작한 이남규는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생명, 자연, 우주의 근원적 질서를 추상적인 화면에 담아냈다.
잊힌 작가를 다시 불러내고, 묻힌 작가를 새로 발굴하는 이번 전시는 한국 추상미술의 다양성과 폭을 한 뼘 더 넓힌다. 다음 달 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