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와 정우성은 늘 붙어 다니는 이름이다. 동갑인 데다 데뷔 시기가 비슷했고, 한국 영화 재부흥의 태동과 약동을 관통했다. ‘젊은 남자’(1994)와 ‘비트’(1997)로 청춘의 아이콘으로 각각 떠오르더니 ‘태양은 없다’(1999)로 인연을 맺었다. 둘이 상징하는 청춘은 달랐다. 이정재가 활달하고 대책 없이 낙관적인 철부지 이미지가 강했다면, 정우성은 내성적이면서도 반항적인 젊음을 대변했다. 정우성을 스타로 도약시킨 ‘비트’(1997)의 민이 청년 정우성을 응축한다. 미래를 꿈꿀 수 없으면서 사랑과 우정에는 최선을 다하는 민은 ‘태양은 없다’의 도철, ‘똥개’(2003)의 철민, ‘무사’(2001)의 여솔 등으로 변주됐다.
한때 청춘을 상징하던 배우들은 부침을 겪곤 한다. 아역배우들이 제아무리 인기 있어도 성인이 되면 예전만큼의 명성을 유지하기 힘든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정우성은 달랐다. 1,000만 관객을 불러모은, 떠들썩한 흥행작은 없었으나 슬럼프라고 할 시기를 거치지 않기도 했다.
정우성의 매력은 폭발적 연기력이라 할 수 없다. 외모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는 카메라 앞에서 근사한 미소를 여전히 작렬시키나, 그 못지않게 멋지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후배들은 계속 등장하고 있다. 잘생긴 배우는 연기를 잘할 때까지 대중이 기다려준다고 하나, 유효기간이 있다. 정우성이 영화 ‘구미호’(1994)로 데뷔한 이후 30년 가까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적인 끌림 덕이라고 생각한다.
정우성은 다능하다. 연기뿐 아니라 제작과 연출, 사업까지 겸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고요의 바다’에 제작자로 참여했다. 감독과 주연을 겸한 첫 영화 ‘보호자’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정우성은 20대부터 영화 연출과 제작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는 2016년 아티스트 컴퍼니를 공동 설립한 이정재에 비해 오랫동안 연출과 제작을 준비하며 다져왔다. 서른 언저리에 인기그룹 god의 노래 ‘그대 날 떠난 후로’와 ‘모르죠’ 등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첫 단편영화 ‘LOVE b’를 연출했다. 2008년에는 영화사 토리스필름을 설립했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토리스필름 주최로 비공개 파티를 열고 감독과 스태프를 초청해 영화계의 눈길을 끌었다. 정우성의 야심이 엿보인다는 해석이 나왔다. ‘고요의 바다’의 각본을 쓴 박은교 작가와는 영화사 설립 무렵 인연을 맺었다. 박 작가는 영화 마더’(2009) 각본을 봉준호 감독과 함께 쓴 이력이 있다.
지난해 하반기 어느 영화 행사 뒤풀이에 갔다가 예의 바른 사업가의 면모를 정우성에게서 본 적이 있다. 그는 아티스트컴퍼니 소속 배우이자 영화계 대선배인 안성기를 만나기 위해 어렵사리 자리를 찾았다. 그는 최근 회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을 안성기에게 차분히 설명하며 휴대폰으로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고요의 바다’ 소개 영상을 보여줬다. 정우성은 “회사에서 가장 어른이시니 짬을 내서라도 이런저런 일들을 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정우성은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미담 제조기’이기도 하다. 지난해 연말 배우 김선영은 ‘고요의 바다’ 제작발표회에서 정우성이 돈 안 되는 자신의 공연에 투자했던 사연을 소개했다. “2, 3년 전 정우성이 공연을 보러 온 후”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며 추가 제작비를 댔다는 내용이었다. 김선영은 “현금으로 어마무시한 돈이었다”며 “그때부터 존경하게 됐고, 앞으로 어떤 걸 하셔도 저는 다 (함께) 할 거다”라고 밝혔다. 김선영과 비슷한 사례는 여럿 있다. 한 독립영화 행사 관계자는 몇 년 전 정우성에게 SOS를 보내자 그가 흔쾌히 지갑을 열어 감동했던 적이 있다고 전했다. 정우성은 송금 후 ‘너무 적은 돈이라 죄송합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배우는 연기로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대중은 과연 배우를 스크린 속 모습으로만 판단할까. 어느 유명 배우가 영화인들과 술을 마시다 만취해 술판을 뒤집자 한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되지 뭐.” 동의하기 어렵다. 배우는 스크린 밖 행동으로도 대중의 호감을 사기도 하고, 비난 받기도 한다. 인품이 연기일 수는 없지만, 인품과 연기가 별개라 할 수도 없다. 정우성은 스크린 밖 호감도를 스크린 안으로 이끄는, 몇 안 되는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