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회사를 운영하던 김 모씨는 3,000만 원 대출을 받으려고 은행을 찾았으나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저축은행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연 22%라는 높은 이자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알게 된 것이 미국의 렌딩클럽이다. 렌딩클럽은 개인이나 법인에게서 투자금을 받아 개인들에게 빌려주는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체(온투업, P2P)다. 당시 렌딩클럽이 제시한 금리는 저축은행의 절반도 안 되는 연 7.8%였다.
국내 온투업 1호 신생기업(스타트업) 렌딧을 창업한 김성준(37) 대표가 2014년에 직접 겪은 일이다.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은 왜 대출 금리가 비쌀까. 왜 한국에는 은행과 제2금융권 사이에 중간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없을까. 의문과 분노에서 출발한 생각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업으로 이어졌죠."
그렇게 해서 그는 2015년 '기술에 금융을 담는다'라는 모토로 렌딧을 창업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 2020년 제정된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법이 지난해 6월부터 발효되면서 렌딧은 날개를 폈다. '2021-1'이라는 등록번호가 말해주듯 렌딧은 국내 온투업 1호 업체가 됐고 사업 개시 6개월 만에 온투업체 중 개인신용대출 1위에 올랐다.
"대출도 삼수했지만 투자도 삼수했어요." 그가 창업 자금을 투자 받으려고 처음 찾은 곳은 벤처투자업체 알토스벤처스다. "알토스는 미국에서 창업해서 P2P 사업을 잘 알았어요. 또 쿠팡, 배달의민족처럼 급성장한 스타트업에 투자한 경험이 많죠."
하지만 알토스는 과거에 김 대표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 김 대표는 미국에서 여성 패션용품을 다루는 전자상거래 스타일세즈를 창업 후 투자받으려고 알토스를 찾았다가 거절당했다. “여성들이 패션용품을 사진 찍어 올린 뒤 어디서 샀는지 추천하는 서비스였어요. 그런데 여자들이 똑같은 옷이나 가방을 다른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을 몰랐어요. 한마디로 여자들의 심리를 모르고 여성 패션 사이트를 창업했죠. 이를 알토스에서 지적하면서 투자를 거절했어요."
하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알토스는 두 가지를 봤어요. 미국에서 P2P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니 한국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규제 사업이니 정부와 국회를 설득할 수 있는 끈기 있는 대표를 원했어요. 그 점에서 투자 삼수를 하며 찾아간 저를 좋게 봤죠."
알토스는 초기 자금 15억 원을 한 달 만에 일사천리로 투자했다. "이례적으로 빠른 투자였죠. 알토스는 정보기술(IT)과 금융의 균형을 맞춘 점을 높게 평가했죠.”
김 대표는 삼성화재를 다니던 미국 스탠퍼드 대학원 동기인 박성용 리스크 총괄이사를 창업 멤버로 끌어 들였다. 이후 렌딧은 전체 직원 50명 가운데 IT와 금융업체 출신들이 절반씩 차지하는 융합 회사가 됐다.
과거 렌딧은 P2P 업체로 통했다. P2P는 개인들에게서 투자 받은 돈으로 다른 개인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개인간 금융업체들의 통칭이다. 하지만 해외 사례를 보면 개인 뿐 아니라 법인도 온라인 금융업체들을 통해 투자와 대출을 한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P2P 대신 금융거래를 중개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마켓 플레이스라고 부른다. "우리 정부도 이를 감안해 법 제정때 P2P 대신 온라인투자연계금융이라는 용어를 정했어요. 이제는 P2P가 아니라 온투업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온투업체들은 개인 또는 법인에게서 투자금을 받아 개인이나 기업에게 대출을 해준다. 은행과 달리 예금을 받을 수 없어서 투자 받은 돈 만큼만 대출해주고 투자금이 소진되면 다음 대출을 위해 투자금을 다시 모은다. 그래서 온투업은 투자 총액이 곧 대출액이다.
렌딧을 주로 찾는 사람들은 중신용도의 서민들이다. "신용점수가 낮아 시중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대출받기 힘든 사람들이나 제1금융권 대출이 꽉 차서 추가로 제2금융권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죠."
김 대표는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정교하게 신용등급을 평가하는 '렌딧 스코어'(LSS)라는 자체 평가기준을 개발해 이들에게 점수별로 대출 금리를 차등 적용한다. "대출 금리는 4.5~19.9%까지 적용돼요. 평균 금리는 12%입니다. 저축은행 금리가 최고 20%, 신용카드 대출이 15% 정도이니 상대적으로 낮죠."
이렇게 대출 받은 사람이 총 1만5,000명이다. "매달 8만건 이상 대출 신청이 들어와요. 대출액은 누적으로 2,600억 원입니다. 1인당 평균 1,000만 원 이상 대출 받았죠."
돈을 빌려주도록 렌딧에 투자금을 넣은 개인 또는 법인의 연계투자 수익률은 얼마나 될까. "렌딧에 연계투자한 개인은 약 8만명, 법인은 100개 이하입니다. 이들의 투자 수익률이 연 평균 7% 입니다. 온투업 투자는 중위험 중수익 상품이에요. 수익률을 높이려면 대출 부실과 연체율을 낮춰야죠."
현재 렌딧의 대출 부실율은 2% 초반이다. 전체 대출 대비 갚지 않은 경우가 2%라는 이야기다. 연체율은 3% 전후로 관리한다.
저축은행보다 낮은 대출이자와 부실 및 연체율을 낮춘 것은 모두 IT 기술 덕분이다. 렌딧은 연계투자와 대출 모두 인터넷 사이트에서 비대면으로 진행한다. 은행처럼 지점과 관련 인력이 필요없어 비용을 아낀 만큼 대출 이자를 낮췄다.
투자는 렌딧 사이트에 들어가 '투자하기' 버튼을 누르면 나타나는 투자 대상 대출상품 가운데 하나를 고르면 된다. "대출 받으려는 사람보다 투자자들이 더 많으면 대출상품이 표시되지 않아요. 요즘 자주 그런 편이어서 투자하기 힘들죠."
자체 신용평가 방법인 LSS는 국가기관인 한국신용정보원과 신용정보업체 나이스신용평가에서 받은 300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신용도를 1~1000점으로 점수화한 지표다.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의 월 소득, 부채 정보, 월 신용카드 사용액, 통신비와 공과금 연체 여부, 거주 지역의 전세값, 매매값 변동추이 등 300가지 항목을 AI로 분석해요. 이런 항목들의 변동폭이 크면 위험도가 올라가죠. 500점 이하면 대출을 받을 수 없어요. 4.5% 금리를 받는 사람들은 900점 후반이고 750~800점대면 중신용자들이에요."
LSS는 렌딧의 핵심이다. "은행은 안정적 소득과 부실 위험이 낮은 사람에게만 대출해 주기 때문에 신용평가 방법을 고도화하지 않아요. 저축은행도 신용평가 방법을 정교하게 개발하지 않고 금리를 높여 부실 위험을 낮추죠. 한마디로 기존 금융기관들은 신용평가의 기술 발전에 투자를 하지 않아요."
그래서 김 대표는 렌딧을 금융업체가 아니라 IT업체라고 강조한다. "온투업은 기술을 고도화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어요. 금융은 콘텐츠이고 핵심은 기술입니다."
온투업체들은 온투업법이 시행됐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 2020년 개정된 자본시장법이다.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면서 펀드가 온투업체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했어요. 라임 사태 등 사모펀드 사고 이후 취해진 조치죠. 그렇다 보니 펀드에 맡긴 국내기업들의 돈이 모두 해외 P2P업체들에게로 빠져 나가요. 외국은 P2P에 대한 펀드 투자가 가능해요. 그래서 미국 P2P 업체들은 해외 자금을 받아 미국인들에게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죠. 우리는 거꾸로 국내 기업들의 돈으로 외국 사람들의 대출을 돕는 셈이죠."
거꾸로 온투업체들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폐해도 있다. "온투업체 가운데 신용대출만 하는 곳은 렌딧이 유일해요. 온투업체들이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를 받지 않는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는 문제가 있죠. 주택담보대출을 하려면 서류처리 등을 위한 대면 작업이 필수여서 비용이 들어가 금리를 낮추기 힘들죠. 이렇게 되면 금리절벽 해결을 위해 온투업법을 만든 취지에 어긋나요. 이 부분은 저축은행 등에서도 불만을 가질 수도 있으니 금융당국이 제도 정비를 위해 들여다봐야 합니다."
김 대표의 신년 계획은 크게 두 가지다. AI의 학습 주기를 높여 신용평가 방법을 더 정교하게 세분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발자들을 계속 뽑을 계획이다.
더불어 대출 규모를 지난해보다 5배 이상 늘릴 방침이다. "3,4년내 1조원 대출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매출은 대출자와 투자자들에게 받는 수수료를 통해 올린다. "일반 금융업체와 달리 이자를 매출에 포함하지 않아요. 대출 이자에서 차지하는 수수료 비중은 4~5%입니다. 월 400억 원 이상 대출을 해줘야 서비스가 원활하게 돌아가죠."
올해 추가로 투자 받을 계획은 없다. "지난해 7월까지 누적으로 940억 원을 투자 받았어요. 그만큼 온투업의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죠."
원래 김 대표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생명공학과에 진학했으나 1학년때 운명을 바꾼 사람을 만나 산업디자인으로 전과했다. "애플 마우스 등 유명 제품들을 디자인한 세계 최고의 디자인 컨설팅업체인 미국 아이데오에서 일하는 재미동포의 특강을 들었어요. 디자인은 제품 외관 뿐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할지 발견해 해결하는 과정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고 바로 산업디자인으로 전과했죠."
2010년 미국 유학도 산업디자인을 위해 스탠퍼드 대학원으로 갔다. "아이데오 창업자인 데이비드 켈리가 대학원 지도 교수였죠. 그런데 창업 아이템 과제들을 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어 1년 만에 중퇴하고 스타일세즈를 창업했죠."
김 대표는 스타일세즈 이전에 사회적기업 이분의일 프로젝트도 창업했다. "스타트업 세이브앤코를 이끄는 박지원 대표와 대학시절에 공동창업해 4년간 운영했어요. 사람들이 일상에서 기부를 실천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회사였죠. 한 병 값을 내고 음료수 절반만 산 뒤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비용을 기부하는 절반 음료수 병을 여기서 개발했어요."
그의 개인적 꿈은 렌딧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원래 온투업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대출 과정에서 겪은 의문과 분노가 뜻밖에 창업으로 이어졌죠. 400조 원에 이르는 국내 신용대출가운데 40%가 높은 이자로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빌려요. 주로 서민들이죠. 이자를 2%만 낮춰도 이들에게 큰 도움이 돼요. 렌딧이 1조 원을 대출해 주면 15만 명이 연 700억 원의 이자를 절약할 수 있어요. 큰 돈을 버는 것보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