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내각의 개혁과 좌절

입력
2022.01.0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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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홍범14조


청일전쟁(1894~98)의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하며 친청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친일 개혁성향의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김홍집 내각의 3차에 걸친 개혁이 이른바 '갑오개혁'이고, 그 절정이 순한글·순한문·국한문혼용체 세 버전으로 1895년 1월 7일 선보인 '열네 가지 큰 법',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14조'였다.

갑오농민전쟁 직후 시작된 '갑오개혁'은 1차로 과거제 및 반상 계급제 폐지와 노비 매매 금지 등 신분제 철폐에 이어 2차 개혁의 근간으로 홍범14조를 반포 시행했다. 고종은 7일 종묘에서 배향하며 독립의 서고문(誓告文)을 고한 뒤, 다음 날 전 국민에게 저 법을 반포했다. 홍범14조의 제1조, 즉 '청국 의존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는 것은, 1636년 병자호란 이래 청의 속국 지위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자, 더 멀리 통일신라 이후 이어진 중국의 속박과 영향력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선언이었다.

홍범14조는 파격이라 할 만큼 근대적이고 개혁적이었다. 민씨 일파를 겨냥, 종실· 척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고, 왕실과 국정의 사무를 분리하고, 세금과 재정 군제를 법제화하고, 갑오농민전쟁의 발단이 됐던 벼슬아치들의 월권과 학정을 견제하기 위해 민법과 형법을 엄정히 했다. 문벌을 가리지 않는 인재 등용과 자질이 뛰어난 청년들의 국내외 교육 기회 확대도 명문화했다. 일본의 입김이 깊이 스몄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긴 했지만, 김홍집 내각의 행보는 그만큼 대담했고,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이었다.

갑오개혁은 3차 '을미개혁'으로 정치적으로 변질되며 친일적 색채를, 적어도 당대 지식인들의 눈에는 도드라지게 드러냈다. 음력 대신 태양력을 도입함으로써 일본의 역법과 맞추었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단발령도 함께 단행했다. 그해 끔찍한 '을미사변'이 터졌고, 을미의병이 거병했고, 갑오개혁이 파국을 맞았고, 조선의 개혁도 내적 주체세력을 잃고 외세 주도로 이어지게 됐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