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책은 일단 펼치는 버릇이 있던 어린 시절에는 모든 책을 차별하지 않고 읽었다. 책장에 정갈하게 꽂힌 성인용 세계 문학 전집부터, 읽기에는 어렸지만 아무도 독서 지도를 해주지 않아서 지나치게 일찍 살인 사건 해결에 눈을 뜨게 한 해적판 홈스와 뤼팽 시리즈, 내 돈으로 처음 사서 수집했던 소녀명랑 소설 시리즈까지, 장르나 책의 두께, 수준을 가리지 않았다. 시리즈로 이어지던 '공포 특급'이라든가, '믿거나 말거나'식의 제목이 달린 세계의 미스터리도 탐독 도서 중 하나였다. 닳도록 읽었던 한 책의 표지에는 조개와 타조의 다리를 합성한 괴생명체의 사진이 있었는데, 이런 책에는 그 유명한 '네시호의 괴물' 이야기를 시작으로 세계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괴생명체며 미확인 비행물체(UFO) 미스터리, 외계인 괴담 같은 이야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세계 역사의 중요한 사건에 관한 음모론이라든가 판타지에 가까운 고대 문명사 역시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는데, 나는 그중 예언에 얽힌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일찌감치 성경의 마지막 편인 요한계시록을 금서처럼 읽던 나에게, 언젠가 세계가 멸망하게 되리라는 예언의 변주는 언제 읽어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예언은 예언일 뿐이다.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세기말에도, 겨우 몇 년 전에도 비껴갔고 인류는 무사하다. 아니 솔직히 무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멸종의 위기에서는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예언이 아니라면 어떨까?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의 세계에는 예언가가 아닌 과학자가 등장한다. 천문학과 대학원생인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런스)는 지구 방향으로 이동 중인 혜성을 발견한다. 위대한 과학적 발견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누려야 마땅했을 디비아스키는, 담당 교수 랜들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와 함께한 궤도 측정에서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두 과학자의 발견은 예언이 아닌 예측이며, 과학적으로 예측 확률이 매우 높다면 다가올 미래가 된다. 이 거대한 재난 예고장을 받아들고 '돈 룩 업'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을 찾은 두 과학자는, 이야기의 전개를 예상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일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권력과 사명을 가지고 공익과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정치인은 그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 멸망이라는 인류 최대의 재난은 천박하게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자신의 안위와 이미지만을 생각하는 정치인,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무가치한 소식을 자극적으로 전하는 미디어와 언론에 휩쓸리며 거대한 농담이 되어버린다. 반지성주의와 자본주의가 뒤덮은 세계를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가 '돈 룩 업'의 장르다.
'빅 쇼트'와 '바이스'를 통해 자기만의 코미디 스타일로 미국 사회와 정치를 풍자하는 재능을 보여준 애덤 매케이 감독은, 지구 멸망의 날에 근접한 풍경 역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스타일로 풀어간다. 특히 멍청하고 근시안적이며 이미지만을 중시하며 편 가르기를 하는 정치인, 백악관을 조종하는 거대 IT 기업의 자본가 캐릭터는 바로 모델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직관적으로 풍자한다. 애덤 매케이는 메릴 스트립으로 시작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제니퍼 로런스, 케이트 블란쳇, 롭 모건, 티모시 샬라메 등 한 영화에 출연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는 배우들을 모아 놓고, 마음껏 콩트와 같은 현실을 풀어놓는다. 만들어낸 이야기는 결코 현실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이는 현실의 아이러니와 우스꽝스러움을 최대한도로 끌어낸다면 그렇게 만들어낸 코미디야말로 현실과 비슷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까마득한 과거로 느껴지지만, 1년 전 미국에서는 일부 세력이 백악관을 점거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모두 입을 모아 했던 말이 "영화도 아니고"였다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그런 순간들을 포착한 영화는 '영화 같은 현실을 담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돈 룩 업'이 바로 그런 영화다. 최근 몇 년간 미국 사회의 풍경을 스케치한 뒤에 이런 세상에 재난을 예고한다면 정치인의, 자본가의, 미디어의, 대중의 반응은 어떨지를 예상해서 만든 영화가, 저절로 코미디가 된 것이다. 대중은 과학자들이 따분한 이론을 근거로 인류 문명에 관해 중요한 정보를 전하는 순간을 인터넷 밈이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만 소비한다. 재난의 소식은 치밀한 정치적 계획이나 전략에 밀리는 것이 아니라, 톱스타의 가십에 밀린다. 멸망 카운트다운이 임박할 즈음에 정치인의 승리를 담보로 겨우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재난 예고는, 자본의 논리라는 막강한 본편에 한 번 더 지연된다. 지구와 충돌할 혜성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위를 봐'와 '위를 보지 마'로 나뉘어 버린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운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터져나오는 웃음은 폭소보다는 헛웃음에 가깝다. 백악관의 정치인들이 도피 계획을 세워뒀다는 음모론에 디비아스키가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에는, 이 모든 일이 지구 건너편 남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며 쓴웃음을 짓게 된다. "진실은 더 우울해. 그렇게 사악하게 굴 정도로 똑똑한 인간들이 아니야." 쓴웃음과 헛웃음도 웃음이기에, 이 작품이야말로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쩌다 인류의 재난은 코미디가 아니고서는 풀 수 없는 장르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영화 속에 나온다. 백악관이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희망을 거는 한도 내에서의 마지막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본가의 논리에 인류를 넘어 지구의 운명을 걸자, 인기와 권력에 흔들리던 랜디 박사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토크쇼에 출연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대화를 재치 있고 매력적이고 호감 있게 할 순 없는 거예요. 어떤 때는 할 말을 제대로 전해야 하고 듣기도 해야 해요." 하지만 그걸 하지 않기 때문에, 재난의 소식까지도 재치 있는 스타일로 가볍게 포장해서 모두가 호감인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이름을 나란히 걸어서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건과 반응들이 서늘하게 뒤통수를 치는 가운데 헛웃음을 짓다 보면, 아리아나 그란데가 연기한 톱 가수 라일리 비나의 노래를 들으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진실을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망할 거야. 반드시 망할 거야. 그러니까 과학자들의 말 좀 들어."
넷플릭스가 '돈 룩 업'의 공개일을 서구권 국가들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 이브로 택한 것 역시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의 일부처럼 보인다. 새로운 구원이 찾아오기 전에 필연적으로 멸망이 올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는 까마득한 예언이었지만,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거의 모든 것을 예측하게 된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멸망의 도래는 정확한 예측이고 분명한 진실이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만큼도 이 명백한 진실을 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돈 룩 업'을 처음 보고 나서는 과연 누군가에게 보기를 권할 영화인가에 관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이 길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설정과 세계관이 중산층 이상의 백인 남성이 바라본 미국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추천을 주저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다양한 반응 중, 기후 위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영화에 대해 남긴 감상을 보고 꼭 이 작품에 대한 글을 꼭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자들의 감상은 매우 명쾌하다. 과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후 위기라는 이름의 혜성을 가리키고 있으며, 기후 위기와 관련된 정보가 알려주는 진실은 대중매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돈 룩 업'을 본 사람들이 멸망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과학이 말하는 진실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음모론과 과학의 언어를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미 할 일을 한 것이다. 영화 속의 혜성은 인류가 아닌 지구 전체를 타격하기 때문에 멸절의 순간은 짧을지 모르지만, 전 인류가 지금 통과 중인 전염병으로 인한 팬데믹을 포함한 기후 위기라는 이름의 혜성은 멸종을 지난한 과정으로 만들 게 틀림없다. 그러니 우리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인류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망할 것인가? 어떻게 아주 조금이라도 그 순간을 늦출 것인가? 농담 같지만 명백한 과학적 진실, 과학이 말하는 멸망에 어떤 태도로 대처할 것인가? 새해에 보기 좋은 영화, 딱 어울리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