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시선이 긴장의 우크라이나 사태로 향하고 있다. 미국 정보당국은 최근 우크라이나 위기 상황을 공개하고 러시아에 경고를 발령했다. 고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사력 배치를 마무리하고 국경지대가 얼어붙는 내년 1월이다. 그때까지 우크라이나 국경 북쪽과 동쪽에 러시아 병력 17만5,000명이 집결할 예상이다. 시베리아 병력을 포함, 방공포 야전병원까지 포함돼 외견상 전쟁은 임박해 있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르면 그리스 정교회 성탄절(1월7일) 이후를 위험 시기로 보고 있다.
충돌이 벌어지면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군을 신속 제압할 능력을 충분히 갖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군사적 대응에 나설 개연성은 낮고, 미국 역시 테러와의 전쟁을 겨우 끝낸 시점에 병력을 해외로 파견할 여유가 없다. 이미 조 바이든 대통령도 미군 배치 가능성에 대해 논의 테이블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처럼 군사적 조건만 따진다면 상황은 우크라이나에게 절대 불리하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땅이 얼어 탱크 이동에 유리한 2개월에 불과하다. 3월 말 동토가 녹아 진흙탕이 되면 우크라이나로선 최대 방어수단이 생긴다. 우크라이나 군사력도 2014년 손 한번 제대로 못쓰고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내준 때와는 비할 수 없게 달라져 있다. 미군은 전투에 필요한 실시간 정보뿐 아니라 방공망, 사이버전 대응을 구축해주고 대전차미사일 재블린 등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 비정규전이 시작되면 러시아군은 수년간 꼼짝 못할 수도 있다. 러시아가 방아쇠를 당긴다면 이번에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더구나 사상자들이 늘어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지여론도 유지되기 힘들게 된다.
국제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군사적으로 명백한 승리, 패배를 장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 게임이 계속되는 배경에는 유럽 내 지정학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 강대국 간 힘겨루기의 외피인 측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유럽에서 갖는 지정학은 사태의 본질에 더 가깝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2차 대전 이후 유럽의 최대 충돌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러시아에게 지정학적 추축이다. 미국 클린턴 정부시절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유럽 전체의 안정과 안보에 있어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다. 러시아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이 중동과 중앙아시아 접근로라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으로의 진출로다. 미 외교의 거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이런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없는 제국이란 더욱 아시아화한 러시아, 유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러시아를 의미한다”고 했다. 러시아가 지정학적 고립을 피해 유럽의 일부가 될지, 아니면 유라시아의 추방자가 될지 그 연결선이 우크라이나인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딜레마는 옛 소련을 잊고 유럽에 편입되는데 거부감이 크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됐다. 러시아는 독립 초기부터 우크라이나 국경을 인정하지 않았다. 공영TV는 일기예보에 크림반도를 포함시켜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지정학은 물론 역사적으로도 지속돼선 안 되는 일이었다.
과거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공 때 지리적 취약성으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 러시아는 안보를 위해서도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풍부한 농업과 공업의 기반, 그리고 4,300만 인구의 상실이란 의미도 작지 않았다. 이 같은 우크라이나와의 결별은 러시아 제국 부활을 위한 기반이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7월 공개된 푸틴의 논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일성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푸틴은 5,000자 소논문에서 같은 종족 우크라이나의 반러 행보를 대량살상무기가 러시아에 사용되는 것에 비유했다.
푸틴이 거론한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의 직접적 배경도 나토 가입 추진이다. 러시아는 독일 통일 이후 유럽은 나토의 동진(東進)을 않기로 약속했는데 지금까지 4차례나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동유럽의 나토 편입을 처음부터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하는 것을 러시아 정부는 인정했고, 미국도 무리한 나토 동진을 자제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민족주의 세력, 군부의 힘이 확대되면서 간극은 커졌다. 방부 처리한 레닌의 시신이 보존돼 있는 것처럼 러시아에는 공산주의적 과거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던 것이다. 그럴수록 동유럽 국가들은 서진(西進)을 통해 유럽연합과 나토에서 러시아 위협의 보호막을 얻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지난 30년 동안 나토는 폴란드를 거쳐 발트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으로 북진했고, 옛 소련 서쪽을 구성하던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회원국으로 가입시켰다.
푸틴도 옛 소련지역이 유럽에 편입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지는 않았다. 2008년 친서방 행보를 보이던 조지아를 침공했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다. 나토 동진의 결과로 러시아가 포위되는 상황은 용인하지 않을 뜻을 대외에 과시한 조치였다.
20년 넘게 권력을 장악 중인 푸틴의 전략적 판단은 뛰어나다. 이번 사태에서 푸틴은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미중 패권경쟁으로 소외된 러시아의 존재감을 회복하고 영향력도 과시했다. 푸틴으로선 미국이 지난 8월 아프간 철수 이후 중국 문제에 주력하는 지금이 더 많은 걸 얻을 호기다. 비록 중국이 푸틴에 공조하지는 않겠지만 미국으로선 대만해협 돌발상황에 따른 2개의 전쟁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서방은 당장 현안인 코로나19 대응과 경제 문제로 우크라이나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많지 않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푸틴은 나토의 동진 중단과 옛 소련 지역에 대한 기득권 인정을 국제적 약속인 조약으로 보장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그는 벨라루스,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야말-유럽 가스관의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는 에너지 카드도 꺼냈다. 이에 바이든은 푸틴과의 화상 정상회담에서 분명한 대가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 제재가 중심인 대가에는 발트해를 통해 독일에 가스를 공급하는 노르트스트림2 제재와 국제결제시스템에서의 퇴출이 거론된다. 노르트스트님2는 폭파 가능성까지 언급되고, 달러 결제를 못하면 러시아의 국제교역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제재가 당장의 효과를 내기 어렵다 해도 푸틴의 국내 기반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토군이 발틱 3국과 폴란드 등 동유럽에 배치되면 러시아의 안보 환경도 더 어려워진다.
스티븐 파이퍼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홈페이지에 게재한 글에서 푸틴의 조치들이 실제 침략보다는 위협용으로 판단하고 있다. 양측 모두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고 푸틴으로서도 충돌없이 일정 양보를 얻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푸틴이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경우 선택이 무엇이냐의 문제다.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음이 그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럴수록 분명한 점은 러시아가 유럽의 외톨이로 전락하고 있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의 무리한 나토 가입 추진도 러시아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러시아가 크림반도 침공에 이어 동부 돈바스 지역 반란군을 지원하며 1만3,000여명의 희생자를 내자 우크라이나는 2019년 개정 헌법에 나토 가입을 아예 명시했다. 이번 사태도 한때 세계 초강대국이 지금은 군사력으로 종종 자존심을 드러내는 지역 패권국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