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 문화의 땅 산둥성의 인구는 1억 명이 넘는다. 면적은 대한민국의 1.5배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도착하는 도시도 여러 곳이다. 중국은 성 하나도 넓다 보니 동남서북으로 나눠 시장이나 문화권을 이야기한다.
산둥의 약칭은 루(魯)다. 루난(魯南)의 중심인 짜오좡(棗莊)으로 간다. 짐작하듯이 예로부터 대추나무가 많았다. 지급시인 짜오좡 산하 현급시인 텅저우(滕州)로 간다. 취푸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져 있다. 기원전 5세기에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이 살았다. 시내 룽취안광장(龍泉廣場)에 두 기념관이 이웃하고 있다.
묵자기념관을 먼저 찾는다. 공자나 노자에 비해 낯설다. 한비자, 순자도 아니고 묵자라니? 2007년 개봉한 한·중·일 합작 영화 ‘묵공(墨攻)’을 통해 다소나마 알려진 인물이다. 류더화, 판빙빙과 안성기 등이 출연했다. 묵가 사상을 영화에 녹였다. 관객에게 낯선 주제였기에 화려한 캐스팅에도 국내 흥행은 미약했다.
기념관 1층에 묵자 조각상이 있다. ‘사기’의 기록으로 보면 묵자가 태어난 곳은 지금의 허난성 동쪽 상추(商丘)다. ‘여씨춘추’의 동한 시대 각주에 따르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바로 텅저우다. 역사서 때문에 두 지역이 서로 묵자의 고향이라 싸우고 있다. 그가 무덤에서 솟아 나오면 모를까 승부가 나긴 힘들어 보인다.
묵자 팬이면 두 곳 모두 가서 볼 일이다. 기념관 벽에 그의 사상을 설명하는 문구가 걸렸다. 저서 ‘묵자’에 나오는 개념인데 여느 백가쟁명보다 난해하다. 영화를 봤으니 ‘겸애(兼愛)’와 ‘비공(非攻)’은 그나마 조금 이해된다. 유교를 배웠으나 인(仁)과 같은 겉치레를 거부하고 보편적 사랑인 겸애를 주장했다. 비공은 살인 현장인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살리려는 실천이다. 묵가 사상에 따라 사회 개혁을 추구하기 위해 조직화했다. ‘강력한 리더’로 해석되는 거자(鉅子)라 불렀다. 영화에서 류더화가 연기한 혁리(革離)가 그랬다.
바로 옆에 노반기념관이 있다. 노반(魯班)은 건축과 목공의 비조로 알려져 있다. 묵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어느 날 노반이 묵자에게 초나라 수군을 위해 발명한 구거(鉤拒)를 자랑했다. 끝부분의 창과 갈고리가 십자가 형태로 일체화된 무기다. 선박을 끌어당기고 밀쳐내는데 효과가 있다. 구(공격)로 인해 적의 선박이 도주하기 불가능하고 거(방어)로 인해 추격이 어렵다고 했다.
노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설로 회자되는 이야기인데 두 사람의 재능을 잘 설명하고 있다. 노반은 비록 ‘의문의 일패’를 당했지만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 기념관이 발명품으로 도배가 돼 있다.
묵두(墨斗)라 부르는 공구가 있다. 건축 현장에서 목재나 석재를 자르는 보조 도구다. 먹을 담은 나무통에서 실을 뽑아 줄을 긋는다. 줄을 보고 자르면 된다. 보통 먹통이란 부른다. 먹이 까맣기 때문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묵두를 사용할 때마다 묵선 끝을 노모가 팽팽하게 당겼다. 노모는 ‘나 대신 묵선을 잡아둘 게 없을까?’라며 힘들어했다. 묵선 끝에 꼬부랑 갈고리를 달아두는 방법을 고안했다. 혼자 작업이 가능해졌다. 이 갈고리를 반모(班母)라 불렸다.
대패질을 할 때마다 부인이 인간 말뚝이 돼 나무를 꼭 잡았다. 다치는 일이 많았다. 중국 대패는 바깥으로 밀 때 깎인다. 나무를 고정시키는 장치를 개발했다. 반처(班妻)다. 발명 천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민감했다. 산에 오르다 풀에 손을 베였다. 풀 모양을 응용해 톱날을 만들었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공구는 거의 노반의 손과 머리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개의 커다란 둥근 바위로 맷돌을 만들었다. 절구와 연자방아까지 농업에도 기여했다. 직조 기구도 마찬가지다. 발명가는 어떤 분야라도 머리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노모를 운구하기 위해 나무를 재료로 소가 끄는 마차도 선보였다. 도자기를 굽는 화로, 성을 공격하는 구름사다리인 운제(雲梯), 물을 동력으로 하는 수차도 만들었다. 원기둥으로 쌓는 2층 제방은 노반제(魯班堤)다. 실제 제방이 텅저우의 유적지다. 나무 비행기인 목연(木鳶)도 만들었다. ‘묵자’에 ‘성이비지(成而飛之), 삼일부하(三日不下)’라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노반이 타고 비행했고 성벽 위를 넘어가 정탐했다는 전설이 있다.
과장됐다 하더라도 그의 재주는 정말 대단하다. 그를 예찬하는 말로 딱 어울리는 백공성조(百工聖祖)가 천장을 두르고 있다. 벽에 걸린 의형영환(儀刑瀛寰)은 바다와 육지까지 천하가 노반의 언행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기념관에 노모의 사당도 있다.
‘묵자’ 기록을 다시 펼치니 노반이 공격하고 묵자가 방어했다. 9번이나 공성과 수성을 반복했다. 묵자가 여유롭게 승리했다. 서로 교류하며 묵가 지도자가 공방전에 대한 상당한 기술력을 축적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공격도 어렵지만 비공도 쉽지 않았으리라.
제자와 둘러앉은 노반이 보인다. 반문롱부(班門弄斧)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노반 문전에서 도끼질한다’는 말이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말과 동의어다. 노반은 도끼질의 명수였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까불면 도끼 맞는다. 시 하나가 떠오른다. 명나라 말기에 순무를 역임한 매지환이 이백의 묘를 찾았다. 이백에 대한 존경일까? 2,000년 전 노반의 명성을 소환하고 있다.
짜오좡 시내를 통과해 타이얼좡(臺兒莊)으로 간다. 경항대운하가 지나는 강변 따라 고성이 자리 잡고 있다. 서문 꼭대기에 건륭제의 어필로 쓴 편액이 걸렸다. 남다른 사연이 있다.
민심 파악에 나선 황제가 운하를 따라 내려가는 중이었다. 마을 안이 풍악 소리로 시끄럽고 떠들썩했다. 알아보니 혼례를 올리는 중이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황제가 대련을 써서 보냈다. ‘세 푼 축의금 보내(三文喜錢), 어쩔 수 없이 받는다면(不得不收), 답례로 주는 재물을 탐해보네(收之貪財)’라는 내용이었다. 세 푼이라면 푼돈이라 혼주는 어떻게 하례할지 난감했다. 경사스러운 날을 망칠 수 없어 고민이었다. 이를 들은 열 살 꼬마가 ‘이게 무슨 어려운 일이란 말이야(這有何難)?’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리를 건넌다. 아치형 문으로 건륭제의 천하제일장(天下第一莊) 패방이 살짝 보인다. ‘천하제일’이라 칭찬한 까닭은 꼬마의 재치 때문이었다. 혼주는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꼬마에게 물었다. 쓸데없는 짓이면 혼내겠다며.
꼬마는 서두르지 않고 붓을 들었다. ‘누추한 집이지만(幾間茅舍), 오지 않을 수 없다면(不能不來), 오셔서 마음껏 드세요(來了貪吃)’라 썼다. 무릎을 치며 결코 실례는 아니라며 연거푸 감탄했다. 대련을 회신하니 황제도 칭찬이 자자했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축하주를 기분 좋게 마셨다. 답글의 주인공을 불러 작위를 내렸다. 베이징으로 데리고 가서 인재 교육을 시키라 했다. 주민들이 꼬마(兒子)를 들어올리고(擡起)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마을 이름(타이얼좡·臺兒莊)을 잘 지으니 이런 일이 생겼다.
성문을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보이는 다리가 장관이다. 명나라 희종 시대인 1621년 처음 건축했다. 3층 구조로 처마가 있는 석공교(石拱橋)다. 양쪽 끝의 구멍은 작고 가운데는 넓게 설계했다. 이전에는 기술이 미치지 못했는데 큰 배가 운하를 지날 수 있게 됐다. 웅장하고 우아하다. 야경은 환상적일 듯싶다.
청나라 강희제가 1707년 남방 순행 당시 방문했다. 백일장을 열었다. 문인과 학자가 참여해 시(詩)나 부(賦)를 지어 다리에 진열했다. 황제가 심사위원이었다. 보잘것없고 가난한 선비 이극경이 1등으로 뽑혔다. 이듬해 과거를 치러 진사를 통과했고 승승장구했다. 그야말로 평보청운(平步青雲)이었다. 단번에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말이다. 급변한 운명처럼 곧바로 보운교(步雲橋)가 됐다.
고성은 대로와 강변로가 동서로 쭉 뻗었다. 두 곳이라 왕복하기 좋다. 상하좌우로 골목길도 많아 다 둘러보려면 한나절 걸릴 듯하다. 큰길에 커다란 탁자를 놓고 붓글씨를 쓰는 서예가가 있다. 관광지마다 작품을 직판하는 장면을 흔하게 본다. 즉석요리가 더 맛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고성을 통과하는 약 3㎞ 구간의 운하는 201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항저우~베이징 대운하’ 노선에 포함됐다. 고성까지 다 포함되지는 않는다. 고성은 국가급 5A 관광지다.
학생 셋이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다. 운하가 보이지도 않고 고건축도 시야에 없다. 앞에는 나무와 정자만 있는데 도대체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지 알 수 없다. 조금 가까이 가서 봐도 모르겠다. 인기척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멈췄다.
사실 고성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쳐 2013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준공됐다. 옛 유적을 여럿 보유하긴 했어도 고성 본연의 맛은 부족하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1938년 3월 16일부터 한 달간 장제스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타이얼좡 대첩이라 부른다. 대승으로 끝나긴 했어도 고성은 폐허가 됐다.
지도를 보면 고성 남쪽의 운하는 물론이고 4면이 물로 범벅이다. 중화고수성(中華古水城)이란 별명도 있다. 골목마다 도랑이 있을 정도로 얽혀 있다. 도랑 건너는 다리도 셀 수 없이 많다. 지대가 낮은 곳은 연못도 있다. 그야말로 물에 잠긴 고성이다. 폭우가 내리면 어쩌나 싶다. 골목과 도랑을 지날 때마다 누각과 사당이 나타나고 빼곡하게 저택과 가게가 붙어 있어 여유 공간이 많지 않다. 고성을 유람하는 배가 떠다니고 몇 걸음 옮길 때마다 부두가 보인다.
천천히 골목을 둘러봐도 폐허 이전의 고성이 아니다. 옛날 사진이 있으면 확인하고 싶다. 고풍스러워 보이지만 세련된 색감을 덧칠해 재생한 듯하다. 중건을 하며 다른 지방의 건축문화를 도입한 흔적이 느껴진다. 덕을 쌓은 가문의 크나큰 복이라는 덕문후덕(德門厚福) 누각도 그렇다. 기와의 두공, 들보에 새긴 목조는 너무나도 잘 꾸민 느낌이 난다. 객잔인 쓰위에톈(四月天) 지붕은 광둥의 전통 가옥인 훠얼우(鑊耳屋)와 닮았다. 가마솥의 손잡이처럼 생겼다는 지붕이다.
강남 수향이나 휘주 마을의 분장대와(粉牆黛瓦) 건축 양식도 보인다. 담백한 벽과 검은 기와, 말머리 담장은 영락없이 닮았다. 화려한 지붕과 원색의 색감은 푸젠의 구춰(古厝) 가옥을 옮긴 듯하다. 푸젠의 별칭이 민이다. 민펑하오(閩豐號)라는 간판을 걸었으니 더욱 심증이 굳어진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강북 수향이라 자랑하니 원래 그대로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운하를 따라 건축 문화도 금방 북상할 수 있다. 민펑하오도 푸젠에서 올라온 객가(客家) 상인의 점포이자 저택이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에 개점했다. 운하가 지나고 상업이 활발하던 곳이니 지방에서 이주한 경우일 수도 있겠다.
타이얼좡은 전국이 주목한 상권이었다. 최초의 근대 은행인 산시 핑야오(平遙)의 일승창(日昇昌) 지점도 있다. 승(升)의 이체자로 썼는데 당연히 본점과 똑같다. 뒤에 붙은 기(記)는 뭘까? 중국에선 가게마다 성씨와 붙여 쓰는 경우가 많다. 이기(李記), 최기(崔記), 장기(張記) 등으로 쓴다. 고대에 가족 단위로 가게를 운영하던 관습이다. 사전에는 인장(印章)의 뜻이 있는데 도장이 곧 신뢰였다. 상품에 믿음이 있다면 기억(記憶)한다. 기호(記號)에서 왔다고도 한다. 일종의 ‘상표’라는 생각이었고 ‘점포’의 또 다른 말이 됐다. 맥도날드(麥當勞)를 마이지(麥記)라고 농담처럼 부르기도 한다.
폐허를 겪은 터라 거주지의 모습이 없다. 고성의 참 맛이 반감된다. 그래도 식수원인 도랑이 실핏줄처럼 골고루 퍼져 있다. 대신 고성 전체가 상업 거리다. 전통 상품부터 공예품이나 먹거리가 차곡차곡 쌓였다. 휴식공간도 더러 있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많다. 음료수 마시고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다.
술집도 빠질 수 없다. 바이주를 만들어 팔던 양조장이 여럿 영업 중이다. 운하를 끼고 있어 상인이나 뱃사공에게 더없이 소중한 벗이었다. 술 한 병을 섭외한다. 발품 기행을 다니면 온갖 동네의 술을 맛볼 수 있다. 현마다 한두 개씩은 있으니 술 브랜드가 2,000가지는 넘을 듯싶다. 대충 헤아려도 최소 100가지 종류는 마셔 보지 않았을까?
1948년 창업한 텅저우 진위안춘(今緣春)이 눈앞에 있다. 1근 500㎖, 알코올 35도다. 1만5,000원이면 살 수 있다. 중국 술 끝말에 유난히 봄(春)이 많다. 10대 명주로 쓰촨 술인 젠난춘(劍南春)이 대표적이다.
술을 봄에만 마시겠는가? 고대의 양조는 동양춘숙(冬釀春熟)이었다. 겨울에 빚어 봄이면 익었다. 옛날에는 모두 춘주(春酒)라 했다. 봄 이야기를 하니 나른해진다. 아무래도 술이 범인이다. ‘금연(今緣)’이란 술 이름이 꿈결 같다. 인연인가, 연분인가? 오늘 만난 역사나 문화, 사물과 사람, 남녀노소 모두 연줄이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