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블록체인 개발자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근에 이 개발자는 싱가포르에 회사를 설립했어요. 국내에서 시작하지 않고 왜 싱가포르로 나갈까요.
"공무원들과 일을 좀 해보니까. 1, 2년 있다가 자리를 옮기더군요. 저희 같은 현장에 있는 목소리는 정책 결정하는 고위 공무원한테는 올라가지도 않고요.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블록체인 기술이 너무 빨리 진화해요. 기다리다가는 기회를 다 놓칠 수 있어요. 안 되겠다 싶었죠. 서울에 들어오지 않을 생각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보려고요."
이 회사는 투자자금도 받았습니다. 다행히 국내 벤처캐피털입니다. 앞으로 6개월 정도 온 힘을 다해 기술 개발을 할 생각이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투자도 해외 자금만 받겠다고 합니다. 승부처는 한국 시장이 아니라 글로벌 마켓이니까요.
게임을 하면 소량의 암호화폐를 주는 게임이 있습니다. '플레이 투 언'(Play to Earn : P2E)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엑시인피니티'라는 게임이 이미 시장을 휩쓸고 있죠.
국내에도 유사한 게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게임심의위원회에서 등급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게임 관련법은 게임으로 획득한 아이템을 돈으로 바꾸지 못하게 합니다. 사행성 우려 때문이죠. 법은 이렇지만 현실은 좀 다릅니다. 유명한 게임 아이템은 큰돈에 거래가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압니다.
P2E 게임을 국내에서 막는 것은 어쨌든 명문화된 법 때문입니다. 국내에서 나온 P2E 게임은 등급을 받지 못해 결국 구글과 애플 앱 스토어에서 퇴출당했습니다.
게임 회사들은 소송을 냈는데요. 아마 법원 판단이 나오려면 1, 2년은 걸리겠죠.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블록체인 업계에서 1년은 다른 산업의 4, 5년에 해당합니다. 엑시인피니티도 처음 시장에 나와서 글로벌 P2E 게임으로 자리 잡는데 6개월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무 우리나라에서 판결 나올 때 쯤이면 시장에 진입해봐야 먹을게 없을 겁니다. 국내 대형 게임사들은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P2E 게임을 해외에서 출시했습니다. 아이디어와 기술은 국산인데 시장은 해외에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답답한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서 사업하는 건 잘될까요. 정부 당국은 이마저도 가로막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내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해외에 관계회사가 있습니다. 해외시장에서 암호화폐 거래소를 개척해보려는 것이죠. 그러나 한국 본사에서 사업을 위해 해외에 송금을 하려고 해도, 못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송금이 여의치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참고로 두나무는 우리은행 민영화에 참여해서 은행 지분을 가진 기업이기도 합니다.
맨처음 언급한 블록체인 기술 기업과는 또 다른 사례인데요. 국내에서 암호화폐 트레이딩으로 상당히 주목받는 트레이더가 있습니다. 최근 암호화폐 전문 트레이딩 기업을 할 생각으로 법인을 냈습니다.
회사를 만들었으니 직원들 급여도 주고, 사무실 임대료도 내려면 당연히 은행 계좌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은행에서 법인 통장 개설이 거부됐습니다.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은행원이 물어보길래 블록체인 관련이라고 했더니 통장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암호화폐 트레이딩을 해주는 기업들이 몇몇 있습니다. 엠버그룹이라는 회사도 그중 하나인데요. 1,1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투자 회사들이 엠버에 투자를 하겠다고 줄을 섰습니다. 엠버가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면 은행 계좌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블록체인 산업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고, 암호화폐 트레이딩도 독자적으로 시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기존의 법이나 제도에서 품어 내기에는 발전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공무원들이 P2E 게임에 등급을 주고, 게임을 장려하고 싶어도 관련 규정이 없어서 곤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법을 고치자니 엄두가 나지 않겠죠. 이해는 합니다만 이렇게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시장은 저 멀리 가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블록체인 특구, 샌드박스 등의 방법으로 제도화되기 전에 사업을 해볼 수 있는 장치가 있기는 있습니다. 다만 매우 불편한 것이 문제죠.
싱가포르로 옮겨 사업을 하겠다는 그 대표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죠.
싱가포르도 블록체인 기업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굴기는 한답니다. 은행 계좌를 열어줄 때도 이것저것 살펴보고요. 그러나 일반 법인 설립 과정은 정말 일사천리로 진행되더랍니다. 자기 나라에 돈을 가지고 들어와서 영업을 하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해외에 진출해서 뭔가 사업을 해보겠다고 하면 웬만하면 다 하게 해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해외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하는데도 막을 이유는 없죠. 국내에서 법과 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에 시도할 기회는 줘야 한다고 봅니다. 특례니 뭐니 이런 것은 바라지도 않고 글로벌 시장의 눈높이에서 경쟁을 해보자는 겁니다.
미국 의회에서는 최근 블록체인 업계의 주요 관계자들을 불러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 시장은 미국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 중인데요. 중국이 자국의 채굴 산업을 스스로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힘의 균형이 완전히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미국도 이런 산업 지형의 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조차 금융 규제 측면에서는 암호화폐를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데요. 이걸 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놓고 직접 들어본 것입니다.
청문회에서 미국 의원들은 비판적인 질문도 많이 했지만, 상당히 지식을 가지고 업계 편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들도 공통적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만든 것도 미국이고, 이것을 꽃피운 것도 미국이다. 미국 기업들이 인터넷 1세대, 2세대를 장악했다. 웹3라고 불리는 새로운 인터넷 산업에서도 미국이 헤게모니를 쥐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구글, 트위터, 애플, 아마존 등은 모두 인터넷 혁명기에 태어난 기업들입니다. 업계에서는 이들을 웹2.0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인터넷이 정보 소통의 장치로 처음 등장했을 때는 단순히 눈으로 정보를 볼 수만 있었는데요. 웹 2.0이 되면서 소비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쓰기도 하고, 영상을 찍어 올리기도 하고, 사람들 간에 소통의 수단으로 인터넷을 쓰게 됐습니다. 웹 2.0 기업들이 글로벌 마켓을 지배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이제 '웹3' 시대에 접어들어서 인터넷은 블록체인 기술과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융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죠.
청문회에 선 미국의 블록체인 기업인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웹3 시대에도 미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의회가 나서서 제도 정비를 해야 한다고. 우리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싶은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웹3는 그야말로 국경이 없습니다. 한 나라의 법으로 발전하는 시장과 기술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뛰어난 기술 인재들이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열린 생각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