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피우면 지옥에 간대요." 화들짝 놀란 그 집사님은 담배를 얼른 다시 집어넣었다. 교회 야유회에서 같이 식사를 마치고, 친하게 지내던 나에게 눈감아 달라는 듯 씩 웃으시며 좀 떨어진 숲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교회 학교 아이가 옆에서 눈치를 채고서는 그만 악담해버린 것이다. 아이가 무슨 악의가 있었겠느냐만, 지옥을 언급하니 옆에 있던 나도 화들짝했다.
평생을 애연가로 사셨던 나의 아버지는 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은 없다며 농담하기도 했다. 아는 지인도 예수님의 첫 기적은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라며 와인을 즐겼다. 맞는 말이지만 처음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던 선교사님들의 눈에는 한국인들의 술·담배 문화가 과하다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 교회는 전통적으로 술과 담배를 금기시했다. 이는 전통의 문제이지 신학적 문제는 아니기에 술·담배를 한다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도 바울도 포도주를 마셨고, 다행히 당시에 담배는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술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폐해를 자주 경고한다. 잠언의 다음 구절을 보라. "재난을 당할 사람이 누구며, 근심하게 될 사람이 누구냐? 다투게 될 사람이 누구며, 탄식할 사람이 누구냐? 까닭도 모를 상처를 입을 사람이 누구며, 눈이 충혈될 사람이 누구냐?"(23:29). 도대체 어떤 과오를 말하려 하기에 이렇게나 비장하게 말할까? 그다음 구절이 밝힌다.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 혼합주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냐!"
거의 3,000년 전 고대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성경이지만, 성경이 괜히 성경이 아닌 것은 읽다 보면 고대가 아니라 21세기 한국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내용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우리네 술 문화를 위 구절은 정확히 지적한다. 한번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절제하지 못하고 '늦게까지' 2, 3차로 이어지니 썩 아름답지 못한 일이 따른다. 부적절한 쾌락에 탐닉하거나, 상상치 못할 본인의 술주정을 다음 날 출근길에 유튜브로 보며 헛구역질을 한다. 최악은 자신의 오물을 입에 물고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위 구절 속 '혼합주'는 분명 칵테일보다는 소맥을 꼬집어 말하는 듯하다.
잠언은 훈육용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마음을 즐겁게 하고 식사에 풍미를 더하는 포도주를 언급하기보다는, 한국의 교회 전통처럼 경고부터 하려 했던 것이 잠언의 목적이었다. "잔에 따른 포도주가 아무리 붉고 고와도, 마실 때에 순하게 넘어가더라도, 너는 그것을 쳐다보지도 말아라. 그것이 마침내 뱀처럼 너를 물고, 독사처럼 너를 쏠 것이며"(23:31-32). 지옥만큼은 아니지만 뱀도 꽤 혐오스럽다.
영국 유학 시절,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을 보았다. 거기도 음주 문제는 있지만, 동시에 신앙인의 품격 있는 술 전통도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죄는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관계(relationship)의 문제다. 위장에 알코올이 들어갔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따지던 무리가 당시 바리새인이었고, 예수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며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은 법이 아니라 사람이라며 아프거나 굶주린 사람을 위해서는 안식일을 어겼다. 바울은 당시 금했던 음식을 이제는 신앙 안에서 자유롭게 먹을 수는 있지만, 내가 먹는 것으로 인해 주변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한다면 먹지 않겠다고 했다. 죄를 정확히 관계의 문제로 보았다.
연초만 되면 많은 이들이 금주를 다짐한다. 만약 술 마시고 다음과 같은 증세가 있다면, 그 다짐 굳게 하시기 바란다. "눈에는 괴이한 것만 보일 것이며, 입에서는 허튼소리만 나올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 누운 것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것 같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때렸는데도 아프지 않고, 나를 쳤는데도 아무렇지 않다. 이 술이 언제 깨지? 술이 깨면, 또 한 잔 해야지' 하고 말할 것이다."(23:33-35). 교리가 아니라 현실에서 거의 지옥에 떨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