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법원이 28일(현지시간) 자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저명한 인권단체인 ‘메모리알’에 해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러시아 정부는 2016년 메모리알을 외국기관 대행 단체로 강제 지정했는데, 그동안 이 단체가 외국기관 등록을 의무화한 ‘외국대행기관법’을 지속적으로 어겼다는 혐의다. 국제사회는 “러시아 법원 판결은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로이터통신과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대법원은 이날 메모리알 해산 청구 소송 공판에서 “검찰의 요청을 수용해 국제 인권단체인 메모리알과 산하 지역 조직 및 관련 기구들을 해산하도록 결정한다”고 밝혔다. 판결 근거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앞서 지난달 러시아 검찰은 이 단체 및 산하 인권센터 등을 외국대행기관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 법은 외국에서 자금 지원을 받아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NGO), 언론매체, 개인, 비등록 사회단체 등에 자신의 지위를 법무부에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활동 자금 명세 등을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포함해 자체 발행하는 모든 간행물에도 외국대행기관임을 명시해야 한다.
검찰은 재판에서 “메모리알이 자체 출판물에 외국대행기관임을 표시하도록 한 법률을 무시하면서 불법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또 “메모리알이 옛 소련에 대해 테러국가라는 허위 이미지를 조장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메모리알은 “이번 소송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며 반발했다. 얀 라친스키 메모리알 의장은 “법원 판결은 국가에 해를 끼치는 공정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우리 사회와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나쁜 신호”라고 규탄했다. 메모리알 측 변호사는 우선 러시아 법원에 상고하고, 향후 유럽인권재판소에도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메모리알은 197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소련 핵물리학자이자 인권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비롯해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이 1989년 결성한 단체다. 초기에는 옛 소련과 러시아의 정치 범죄를 연구ㆍ기록하는 데 주력했으나, 1990년대 체첸 독립 전쟁에 목소리를 내면서 인권단체로 거듭났고, 최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강압 정치와 반대파 탄압을 비판해 왔다. 옛 소련권인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조지아뿐 아니라 이탈리아 등 서방 국가에도 지부를 두고 있다.
국제사회는 법원 판결 직후 메모리알 지지 성명을 잇달아 내놓았다.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메모리알 폐쇄는 언론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 침해”라면서 “단체 해산을 목적으로 러시아 정부가 외국대행기관법을 이용한 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명백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의장인 안 린데 스웨덴 외무장관도 “러시아 국민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한 중요한 출처를 잃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