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몰랐던, 가장 현대적인 미술... '러시아 아방가르드' 걸작 한자리에

입력
2021.12.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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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12월 31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복잡한 현실 세계를 점, 선, 면으로 단순화시킨 바실리 칸딘스키,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만을 하나 그려놓고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선언한 카지미르 말레비치. 현대 추상미술을 이끈 두 러시아 거장의 걸작이 한자리에 모인다.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리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에서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는 물론 국내 관객에겐 낯설지만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 류보프 포포바, 미하일 라리오노프, 나탈리야 곤차로바 등 러시아 천재 미술가 49명의 작품 75점을 만나볼 수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 탄생해 가히 '미술의 혁명'을 일으킨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역들이다.



'뜨거운' 칸딘스키... '차가운' 말레비치, 러시아서 가장 비싼 작가 온다

이번 전시에는 '내면의 소리'를 화폭에 담아낸 칸딘스키의 '즉흥' 연작 세 점이 걸린다. 1909년작 '즉흥 No. 4'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거친 붓자국이 만들어내는 반복적 리듬감이 두드러진다. 칸딘스키가 자신의 내면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본격 추상화로 나아가기 전 단계를 엿볼 수 있다. 1913년작 '즉흥'을 통해서는 그의 관심이 색채에서 선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흥 No. 217 회색타원(1917년작)'은 그가 갈고닦아온 추상 실험의 절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말레비치의 작품 세계에 깃든 추상적 경향은 이른바 뜨거운 추상(비기하학적 추상)을 대표하는 칸딘스키와는 결이 다르다. 그는 극단적인 절제를 통해 아주 단순한 기하학적 형상에 매달리는 절대주의의 창시자로, 일명 차가운 추상(기하학적 추상) 계열의 중심축을 이룬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절대주의(1915년작)'는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극소수의 절대주의 초기작 중 하나다. 보험가액은 무려 1,200만 유로(약 165억원)에 달한다. 전시작 중 가장 비싸다. 참고로 말레비치는 러시아 미술 작품 경매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작품 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1916년작 '절대주의 구성 회화'는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580만 달러(약 1,015억원)에 낙찰됐다. 이번 전시에는 절대주의 탄생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는 그의 1913년작 '피아노를 연주하는 여인'도 걸린다.



'퇴폐 낙인'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칸딘스키, 말레비치만 있는 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미학적 급진주의를 표방한 '러시아 아방가르드'로서는 국내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현대 사진 예술과 디자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로드첸코의 '비구상적 구성(1919년작)'과 리시츠키의 '프로운 1A(1921년작)', 포포바의 '회화적 아키텍토닉스(1917년작)', 기존 관념과 미의식을 비꼬고 이를 전복하는 라리오노프의 '유대인 비너스(1912년작)', 러시아 전통적 회화 양식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곤차로바의 '추수꾼들(1911년작)' 등이 대표적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안팎으로 이중고를 겪었다. 스탈린의 등장과 함께 퇴폐 미술로 낙인 찍히고, 냉전시대 이데올로기에 가로막혀 서양미술사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이내 혁명의 예술로 부각되면서, 구미 중심 미술사의 지평을 넓히는 예술 사조로 재조명되고 있다. 전시 총괄자인 김영호 중앙대 교수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남긴 미술의 유산은 구미 지역의 모더니즘 미술로 이어지며 한국의 단색화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며 "지구촌 시대에 한국 현대미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는 게 오늘 우리에게 제시된 과제이며, 이는 곧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전시는 내년 4월 17일까지.

권영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