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 튀어나온 건물' '텔레토비 집'... 난독증 소년, 건축을 뒤집다

입력
2021.12.25 10:00
[영국 건축 거장 리처드 로저스 타계]
파리 '퐁피두 센터'·런던 '로이드 빌딩'·서울 '파크원'
피렌체에서 태어나 6세 때 런던으로 이주
난독증 심하게 앓았던 유년시절 딛고
사람들에게 영감 주는 도시 풍경 바꿔
"건축은 일상에서 누구나 접하는 예술"

편집자주

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여행이 있습니다. 세계 건축을 통해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살펴봅니다.

연간 700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모으는 프랑스 파리의 복합문화공간 ‘퐁피두 센터’는 1977년 완공 당시 ‘내장이 튀어나온 건물’이라는 오명을 들었다. 건물 바깥으로 파이프와 철골, 각종 배선들이 드러난 모습에 사람들은 혹평을 퍼부었다. 센터를 공동 설계한 영국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는 훗날 “개관 후 센터 앞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내가 이 건물 건축가라고 했더니 우산으로 내 머리를 치고 갔다”며 웃지 못할 일화를 전했다.


“인생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었다”

‘퐁피두 센터 건축가’로 유명한 건축 거장 로저스가 지난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향년 88세.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로저스의 화려하고 독보적인 건축은 건축의 안팎을 뒤집고, 도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놓았다”고 그를 평가했다. 그는 최첨단 기술을 건축에 활용한 ‘하이테크 건축’의 대표 주자기도 했지만 건축의 내·외부를 뒤집는 ‘인사이드 아웃’ 건축의 창시자기도 하다.

로저스는 1933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가족은 1939년 이탈리아에 무솔리니 정권이 들어서자 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산업화가 한창이던 런던의 풍경은 어두웠다. 로저스는 “인생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삶도 녹록지 않았다. 어머니가 요양 차 스위스로 떠나고 기숙학교에 간 로저스는 난독증을 심하게 앓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11세가 돼서야 겨우 글을 읽었다.

로저스는 사촌이 운영하던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건축에 눈을 떴다. 이후 런던 AA스쿨(영국건축협회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미국 예일대에서 건축을 공부하며 절친한 친구이자 ‘하이테크 건축’을 함께 이끈 건축가 노먼 포스터(86)를 만났다. 둘은 1967년 의기투합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팀4’라는 건축사무소를 열었고 10년 후 둘은 ‘스타 건축가’로 성장하면서 각자 독립했다.



안팎이 바뀐 파격적인 건축

로저스의 건축은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섰다. ‘퐁피두 센터’ 외 또 다른 대표작인 런던 로이드보험의 사옥인 ‘로이드 빌딩’(1986년 완공)은 첨탑과 돔 등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둘러싸인 런던의 풍경을 파격적으로 바꿨다. 엘리베이터, 냉난방, 전기, 계단 등의 기능 시설을 외부의 6개 철골 타워로 분리해 배치했다. 높은 톱니 모양의 바퀴는 고풍스러운 런던을 최첨단 도시로 단숨에 변화시켰다. 주요 시설을 외부로 빼고 내부는 텅 비웠다. 특정한 용도에 맞춰 공간을 구획하지 않아 빌딩은 다양한 사람들이 섞이며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로저스는 “퐁피두 센터가 거대한 광장에 있는 놀이 공원이라면 로이드 빌딩은 런던의 중세풍 거리에 끼워 넣은 민간 클럽이다”라고 설명했다.

방탄소년단(BTS) 등이 콘서트를 한 런던 남동부의 밀레니엄 돔(현 O2 아레나)도 1999년 완공 당시 ‘텔레토비의 집’에 비유되며 논란이 됐다. 돔은 2000년을 앞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직경 365m의 돔과 돔을 지지하는 높이 100m의 12개 기둥이 꽂혀 있는 형태다. 완공 당시 찰스 왕세자는 “기괴하게 생긴 푸딩”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막대한 유지 비용과 운영 문제 등으로 1년 만에 문을 닫는 수모도 겪었다. 하지만 돔은 리모델링을 거쳐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비틀스, 마돈나, 비욘세, 아델 등 글로벌 톱스타들의 대표적인 공연 무대로 명성을 되찾았다.




이 밖에도 치즈강판처럼 비스듬한 고층 빌딩인 런던의 ‘레든홀 빌딩(2006년)’, 물결치는 파도를 연상시키는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2005년)’, 거대한 양탄자를 닮은 지붕을 얹은 ‘웨일스 의회의사당(2005년)’ 등 그의 대표작들은 늘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7월 서울 여의도에 완공된 대형 복합문화시설 ‘파크원’도 그중 하나다. 당시 빌딩 테두리를 감싼 붉은 띠가 튄다는 논란이 됐었지만, 한국 전통 건축인 단청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하루에도 방문객이 수만 명에 달하는 여의도 대표 명소로 꼽힌다.



“건축은 일상에서 접하는 예술”

로저스는 이 같은 논란을 대환영했다. 건축이 일상에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예술의 한 형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은 시민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격렬하게 비판하는 예술이다”라며 “우리 삶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건축은 삶과 도시에 영감을 주고, 도시를 구성한다”고 강조해왔다. 2000년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이 부임하면서 도시총괄건축가를 맡은 로저스는 당시 런던의 풍경을 바꾸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런던의 주요 현대 건축물로 꼽히는 런던 시청(2002년), 걸킨 빌딩(2003년), 더 샤드(2013년) 등 주요 건축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끊임없이 건축과 인간, 도시에 대해 고민해온 그는 공을 인정받아 1991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2007년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2006년과 2009년 영국 최고 권위의 건축상인 스털링상을 수상했다. 폴 골드버거 미국 건축비평가는 “건축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었던 그는 '긍정적인 도시화'를 지향했다”며 “단절된 공간의 집합체가 아니라 문명화한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만드는 데 헌신했다”고 그를 기렸다.

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