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간다. 한줌 사랑을 위해."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이를 포대기로 둘러 업은 여자가 노래한다. 그 사랑은 자식도 남자도 아닌 영화다. 한국전쟁 직후 혼란한 시대에 무모한 도전을 했던,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자 '아프레걸' 박남옥이 무대에서 되살아난 순간이다. 아프레걸은 한국전쟁 이후 사회에서 주체적 역할을 찾으려는 여성상을 일컫는 당대 신조어다.
이달 17일 다시 막을 올린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은 국립극장의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이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영화 '미망인'을 극장에 올리기까지 박남옥의 고군분투를 풀어냈다. 국립극단장이 된 김광보 연출, 고연옥 작가, 나실인 음악감독 등 초연 제작진이 이번에 판을 더 크게 벌렸다. 무대에 오르는 인원(75명)만 초연의 배다. 올해 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초연을 단 5회밖에 선보이지 못한 아쉬움을 푼 셈이다.
'명색이 아프레걸'만의 색깔은 단연 음악에 있다. 창극과 뮤지컬의 특성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나실인 음악감독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초연 당시 창극을 기대한 관객의 실망 섞인 반응도 들었다"며 "(스스로도)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정통 창극이 아니라 현대적 음악극으로 한발 더 간 '명색이 아프레걸'의 색을 지키는 선에서, 음악을 대거 수정했다. 덕분에 이번 공연 음악이 소리꾼의 발성과 한국어의 맛을 더 잘 살렸다고 그는 자신했다. 또 관객의 공감도를 더 높이기 위해 박남옥의 여린 마음, 감성을 전달할 수 있는 넘버도 적절히 추가했다.
풍부한 음향도 이번 공연의 매력이다. 소규모 실내악 편성이었던 초연과 달리 22명의 국악관현악단에 4명의 밴드세션이 추가돼 총 26인조가 연주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악기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음악 구성도 가능해졌다. 나 감독은 "국악기 음색이 독특해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썼다"면서 "예를 들면 가냘프고 슬픈 음색의 해금은 박남옥이 꿈을 생각하는 장면 등에 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박남옥이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당차게 선언하는 장면에서는 과감하게 일렉기타를 전면에 내세운 음악으로 극의 분위기를 끌고 가기도 했다.
한국 오페라계에서 떠오르는 작곡가인 나 감독의 국악 도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년 전에도 김광보 연출, 고연옥 작가와 함께 한 '극장 앞 독립군'이 국악관혁악단이 참여한 음악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음악극 '공산성 달 밝은 밤'과 창극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도 대표적 창극 작업이었다. "예술가로서 박남옥에게 공감이 간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어려운 도전인 걸 뻔히 알아도 뛰어드는 이런 모습 때문일지 모르겠다. 그는 "음악만 보면 호불호가 있겠지만 노래, 연출, 무용 모두 조화롭게 담은 무대를 통해 관객이 박남옥 인생에 집중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에 늘어난 무용단의 무대도 압권이다. 무대에 서는 국립무용단원 인원이 초연(6명)보다 3배 이상 늘어 22명이 됐고, 안무가 이경은도 새롭게 참여했다. 극 중 박남옥의 심정을 드러내는 독무는 물론이고, 그가 겪는 시련과 고비를 대규모 무용단의 안무로 전할 때 감동이 크다. 고난도 아크로바틱 안무를 포함해 무용수들의 연기로 유명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가 떠오를 정도였다. 공연은 오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