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했던 한 통의 전화, 보이스피싱

입력
2021.12.23 19:00
26면

힘 없고 돈 없는 서민 노리는 잔혹범죄
첨단 지능화로 연 피해액 7천억 넘어
피해예방, 피해자 구제에 특단조치 필요

A가 그 끔찍한 전화를 받은 건 10월 14일이었다. 평소처럼 직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씨 되십니까?"

그쪽은 자신을 어느 검찰청 소속 검사라고 했다. 그 '검사'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당신 계좌가 도용됐고, 피해자가 꽤 발생했다. 당신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구속을 피하려면 피해자 돈부터 해결해야 한다. 일단 돈을 보내주면 오후 6시에 다시 돌려받도록 해주겠다.' 통화 도중 영장 사진과 피해내역까지 문자메시지로 전송됐다.

'검사'는 집요했다. 절대 전화를 끊지 못하게 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섣불리 부모님한테 알리면 그 분들한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고 했다. 결국 A는 통장을 다 털어 950만 원을 마련했다. 그런 후 '검사'가 말해준 카페로 갔고, 그곳에서 검찰 신분증을 제시하는 한 여성에게 돈을 전달했다.

그러나 6시가 되어도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사'는 하나 더 요구했다. 950만 원을 찾으려면 그 액수만큼 공탁을 걸어야 하니까, 다음 날까지 950만 원을 추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A는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루 상황을 복기했고, 그제서야 말로만 듣던 보이스피싱임을 알게 됐다. 눈앞이 캄캄했다.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두려움과 자책감이 몰려왔다.

다음 날 A는 아버지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공탁금'을 받으러 나온 여성을 체포했다. 하지만 950만 원은 찾지 못했다. 경찰에 따르면 수거책은 '알바'였으며, 돈은 이미 '공중분해'돼 추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상은 내가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들은 보이스피싱 경험담이다. 피해자 A는 그의 20대 딸이다. 언뜻 들어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어떻게 다 큰 성인이 '검사'라는 말 한마디에, 950만 원이나 되는 돈을 그렇게 쉽게 내줄 수 있나. 보이스피싱 뉴스를 수없이 접했을 텐데, 왜 한 치의 의심조차 안 했을까.

하지만 막상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누구라도 당할 수 있다는 게 피싱 피해자와 수사 관계자들의 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검사'라고 하면 드라마에서나 봤을, 사회 경험도 별로 없는 평범한 사람에게 갑자기 검찰에서 전화가 왔다고 치자.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계좌도용' '피해변제' '구속영장' '공탁'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부모님까지 피해 볼 수 있다고 압박한다고 치자. 공포감에 휩싸여 합리적 판단은 마비되고, 의심이 들어도 상대 페이스에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도 아버지에게 "전화 받는 동안 완전히 멘털이 무너져버린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요즘 보이스피싱에는 예전 개그에 나왔던 어눌한 조선족 말투도, 황당한 상황 설정도 없다. 작년 한 해 피해액이 7,000억 원이 넘은 것만 봐도 얼마나 첨단범죄, 지능범죄로 진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A는 어릴 적부터 저금해 온 돈, 많지 않은 월급 아껴 가며 차곡차곡 모은 돈을 다 잃었다. 나중에 내집 마련에 쓰려고 부었던 청약통장까지 해약했다. 돈도 돈이지만 자책감은 또 얼마나 클까. 지인은 상처받은 딸이 너무 안쓰럽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은 대부분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얼마나 악랄한 범죄인가. 대학생, 사회초년병, 자영업자, 노인 등 얼마나 더 많은 약자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하나.

지난 10일 범부처대책회의에서 구윤철 국무조정실장은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각오로 보이스피싱을 뿌리 뽑겠다"고 밝혔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하루빨리 이 잔혹극을 끝냈으면 한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돈이 간절한 사람들인 만큼, 단 얼마라도 피해액을 되찾거나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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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 콘텐츠본부장